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다쟁이 Oct 22. 2023

같은 책, 다른 생각(9)

-테드 창의 바빌론의 탑-


(아이가 읽은 -바빌론의 탑-)

이 책을 처음 읽을 때, 전혀 감각이 없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 라니, 제목부터가 너무 식상했고 구름이 얇게 깔린 듯한 표지도 너무 희뿌옇게 보였기 때문에 그다지 파워풀한 인상을 남겨주지는 않았다. 그런 표지 때문인 걸까, 솔직히 말하자면 이 작품이 말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에 관해서, 나는 희뿌연 밤의 가로등 빛줄기처럼 엷게 느낄 뿐이다. 한마디로 작가가 무슨 의도로 이 글을 쓰게 한 건지 이해하기가, 나의 관점에서는 어려웠다.


하늘에 닿을 듯이 높게 뻗은 바빌론의 탑. 바빌론 사람들은 하늘 끝에 닿기 위해서 끝을 알 수 없는 탑을 쌓고 또 쌓는다.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이해되지 않는 설정이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옛날 사람들에게 하늘은 동경의 세계이자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하늘을 나는 새를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역할로 생각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하늘이라는 곳은 인간에게 접근 불가한 곳인 동시에 접근하고 싶은 곳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하늘에 닿으려고 애를 썼다. 하늘 천장을 뚫을 듯한 높은 탑을 쌓는 방법으로.

그러나 그 탑은 무너져 내렸고, 주인공은 깨닫게 된다. 하늘과 땅은 결국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하늘과 땅이 결국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 걸까? 아무리 멀어 보였던 것도 닿을 수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종이를 말면 원기둥 모양이 되듯 가장 멀어 보였던 곳이 가장 가까운 곳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암시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신에게 범접하려 했던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작은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하려는 의미에서 이렇게 썼을까.


땅에 고인 물을 바라보면 그 사이로 하늘이 비친다. 볼리비아의 소금 사막에서는 두 하늘을 만날 수 있다. ‘그 누구도 혼자가 아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봐라. 거기 하늘만은 너와 함께 있다.’라는 말처럼 하늘은 늘 우리 곁에 있는 존재이다. 그건 정복해야 할 정상이 아니라 이미 디디고 있는 받침대이다.

그걸 밟고 눌러, 그 위에 오르려고 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힐라룸이라는 보편적인 인간을 통해서 그 존재 자체를 대변하는 동시에 교훈을 주고 있음에, 놀라움을 느낀다.


이 책의 옮긴이는 말했다. ‘테드 창의 탁월함은 인간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쳐왔고 장래에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 과학철학적 담론을 가능한 한 여러 측면에서 철저하게 파헤치는 동시에, 그것을 지극히 인간적인 은유에 담아 펼쳐낸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이란, 땅이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한편으로는 철학적이고 한편으로는 과학적인

이 논제를, 여러 시선에서 바라봐 줄 수 있게 하면서도, 힐라룸이라는 존재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를 충실히 담아낸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라는 데에 나는 동의한다.


그렇기에, 읽고 난 뒤에는 주저 없이 이 책의 제목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관해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읽은 -바빌론의 탑-)


테드 창을 글로 만났던 사람들은 그의 가치를  하나같이 칭송했다.  왜일까? 궁금증을 가지며 어렵지만 나도 그의 세계로 들어가 봤다.


(바빌론의 탑)은 과연 실제인가?

힐라룸이 상상한 꿈의 공간일까?

아니면 힐라룸은 진짜로 꿈을 꾼 것일까?


창세기에 고대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건설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바벨탑은 하늘에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도전으로 그려진다.


그렇다면 책 속의 바벨탑은 무엇일까?

힐라룸은 그 바벨탑의 하늘을 뚫기 위해 나아간다.

그것은 하늘에 도달하기 위한 인간의  호기심인가? 아니면 인간의 한계에 부딪히고자 하는 도전인가? 그도 아니면 깨달음의 과정일까? 궁금했다.


힐라룸이 어지러운 발걸음을 내디뎌 오를수록

나도 같이 바벨탑에 오르고 있었다.

그는 과연 하늘에  도달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탑을 오른다는 건 고행과 위험의 연속이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오를수록 아찔한 바벨탑에서  힐라룸은 탑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만난다.

마치 탑을 땅 위에 펼쳐놓은 것처럼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었고 그 삶에 만족했다. 그들은 땅에 대해 더 이상 열망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삶은 수세기 동안의 여행자였던 것이다. 바벨탑 속의 사람들이 문득 수도자처럼 느껴졌다.


하늘에 대한 욕망을 가진 힐라룸은 하늘에 다가갈수록 자신이 속한 세계가 어디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하늘과 대지 사이에 길을 잃고 부유하는 인간이었다.

그가 본 하늘은 존재하기도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범접할 수 없는 신과 같은 그 무엇인데 그는 왜 그 실체를 그렇게 갈망했을까?

힐라룸이 어리석어 보였다.


그리고 막상 그 실체와 마주한 힐라룸은 하늘에서 내리는 물과 함께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다시 눈을 뜬 곳은 그가 살던 시나르 평원.

하늘과 땅은 둥근 원통처럼 맞닿아 있었고, 힐라룸은 신의 세계에 다가갈 수 없음을 깨닫는다.


나에게도 바빌론의 탑은 신비의 세계였다.

알 수 없는 신의 세계로 나아가는 표지판 같은 존재.

궁금하기도 했지만 궁금함만으로는 그 길에 들어서기 무서운 존재.

우리의 삶은 결국은 내가 태어난 곳으로 다시 돌아오고 만다는 원점회귀의 삶의 귀환을 가르치기 위한 신기루 같은 존재.

힐라룸은 탑에 오른 것이 아니라 한바탕 꿈을 꾼 것이 아닐까?

꿈속에서 하늘과 대면했고 땅으로 돌아와 하늘이 땅과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그리고 신의 영역에 경외심을 가졌다.

힐라룸은 욕망을 가진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욕망이 무너지고야 자신의 한계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도 힐라룸 같은 평범한 인간이다.

같이 올랐던 바벨탑에서 나도 같이 땅으로 추락해 버렸다. 내가 얻은 깨달음은 무엇일까?

분명한 건 내가 가진 욕망의 무게만큼 수레의 짐은 더 무거워질 것이라는 것이다. 

욕망의 벽돌을 덜어낼 때 나는 자유로워진다는 걸 알았다.


바벨탑을 같이 올랐던 나도 욕망이라는 무거운 꿈을 한바탕 꾼 거 같았.




이전 08화 같은 책, 다른 생각(8)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