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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선비 Mar 24. 2021

8. 원정대장 서불


二十八年

齊人徐市等上書言, 海中有三神山, 名曰蓬萊方丈瀛洲, 僊人居之. 請得齋戒, 與童男女求之, 於是遣徐市發童男女數千人, 入海求僊人.

-司馬遷 <史記·秦始皇 本紀>-


진시황 28년

제(齊) 나라 사람 서불(徐市) 등이 글을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다 가운데 세 개의 신산(神山)이 있습니다. 이름을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이라 하는데, 거기에는 신선들이 살고 있습니다. 청하옵건대, 목욕재계하고 나서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데리고 신선을 찾아 나서게 해 주시옵소서.” 이에 진시황은 서불을 시켜 수천 명의 동남동녀를 선발하여 바다로 들어가서 신선을 찾게 하였다.

-사마천, <사기·진시황 본기>-     



     

벌써 8년 전의 일이다.

진시황이 즉위한 지 28년이 되던 해, 드디어 불로초를 찾기 위한 원정대가 출발하게 되었다.

원정대장은 서불이었다.

5000명의 젊은 남녀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떠나는 서불을 불러 진시황은 남몰래 한 번 더 다짐을 받았다.

“내가 그대에게 이 일을 맡긴 까닭은,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그대가 누구보다 잘 알리라 믿기 때문이오. 

우리가 만난 지도 벌써 3년의 세월이 흐르지 않았소? 

그동안 그대가 나를 곁에서 지켜보았으니, 새삼스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쳐 북방 오랑캐와 싸웠던 완옹중을 기리기 위해, 내가 그의 모습을 본뜬 금인을 만들어 궁궐 문 앞에 세운 것을 세상 사람들은 다 알고 있소. 그만큼 나는 내가 믿는 사람에게는 나 또한 모든 것을 바친다는 말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세상 사람들은 나를 잔혹하다고 손가락질하고 있소. 하지만 그건 모두 그들이 그럴 만한 요인을 제공했기 때문이오. 

내가 그동안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사람을 보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건 그대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오. 지금껏 들어온 그 숱한 비난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제 또다시 그대를 보내니, 어제까지의 잘못은 오늘을 위한 포석이라는 것을 그대와 나는 이미 알고 있지 않소?

그러니 앞으로 어떠한 말을 듣더라도 우리가 나눈 약속은 서로가 지켜야 하오. 

이후로 누가 뭐라고 해도 나도 그대의 말만을 믿을 것이니, 그대도 내 말만 믿어야 하오. 

앞으로 조정을 통해 올리는 진언에는 어떠한 내용의 보고를 해도 좋소. 상황에 맞추어 그때그때 무슨 소리를 해도 상관없다는 말이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나는 그대와 직접 대면해서 받는 보고만 믿을 것이오. 

다행히도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대가 불로초를 찾으러 간다는 사실에 대해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고 있소. 

그 덕분에 나도, 내가 다른 신하들이나 백성들로부터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러니 그대는 이번 일과 관련해서 어떠한 말을 듣게 되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오로지 나만 믿어주시오. 알겠소?”

서불은 다시 한번 깊이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폐하, 저는 이미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했습니다. 

그러니 제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한번 맹세한 것을 어기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제가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제가 죽었을 경우뿐입니다. 

하지만, 제겐 날랜 군사를 제외하고도 오천 명의 동남동녀가 있고, 동쪽 바닷길을 손바닥처럼 읽어낼 수 있는 동명(董冥)이 있습니다. 천하의 진나라 젊은이를 그 누가 해칠 수 있겠습니까? 

아무 염려 마시고, 제가 다시 모시러 올 때까지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진시황은 비로소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나이 마흔을 갓 넘긴 진시황은 이제 막 쉰 고개에 접어드는 초로의 서불에게 신뢰와 기대에 찬 시선을 보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튿날, 찬바람이 감돌기 시작하는 10월의 아침을 깨우며 길을 떠나는 서불의 행렬은 장관 그 자체였다.

오로지 황제의 무병불사(無病不死)를 위해 시작되는 이 충성스러운 행차 준비에 아까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더구나 얼마의 세월이 소요될지 모르는 여정인 데다 동원된 인원만 해도 5000명이 넘으니, 그 행차가 얼마나 웅장 했겠는가.


5000명의 인원은 모두 전차부대 형식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수레에 운거(雲車)라는 이름을 붙였다. 

불을 보듯이 뻔한 앞날의 험한 여정이었기에, 무거운 수레의 이름이라도 그렇게 붙여서 일행의 마음을 위로하려는 서불이 지은 이름이었다. 

이렇게 해서 500대의 이른바 ‘구름 수레’가 준비된 것이다.     

이들은 우선 운거 한 대마다 남녀 각 다섯 명씩, 총 열 명의 인원을 배치하였다. 

이들 열 명 가운데 한 명을 뽑아 소거장(小車長)이라는 직책을 부여하였는데, 소거장은 수레에 실린 열 명의 짐바리는 물론 각 수레에 미리 실려 있던 나무 상자를 중간 목적지인 봉래항까지 무사히 운반하는 책임을 맡았다. 

이들 외에도 운거에는 호송 병력이 각각 72명씩 배치되었다. 

이 숫자는 춘추시대에 실제 전투에서 각 전차에 소속되었던 보병의 병력 수를 그대로 본떠서 결정한 것이다. 이들은 실질적으로 수레를 호송하는 임무를 맡은 정예병들이었다. 

이들이 봉래항에 도착할 때까지의 보급을 책임진 부대는 별도로 배치되었다. 모든 보급물자가 운거 단위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각 운거마다 보급물자를 실은 수레 세 대가 배정되었다. 

이 외에도 수레를 정비하는 자, 말을 관리하는 자, 부식을 담당하는 자 등등을 포함하면 별도로 배정된 인원이 각 운거마다 30명은 족히 되었다. 

결국 각 운거에 배정된 인원은 도합 110명이 넘었다.

또 이렇게 편제된 운거 열 대를 한 부대로 묶어서 조(組)라 하고 별도로 한 명의 조장(組長)과 군사를 통솔하는 대장(隊長)을 두었다.

실제로 이날 수도 함양을 떠나는 병력을 헤아려보니, 불로초를 찾으러 떠나는 5000명보다 이들을 호송하는 군사가 거의 열 배에 가까운 5만 명이나 되었다. 

배가 출항하는 봉래까지의 육로만 해도 수도 함양에서 1600리가 훨씬 넘었다. 워낙 멀고 험한 길이라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해도, 최대한 우기(雨期)를 피해야 원정길이 순조롭다. 물론 그렇게 되면 한 번의 겨울을 길 위에서 보내야 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원정대를 호송하는 군사만 해도 5만에 달했다. 서둘러야 했다.     


이번 원정에 동원된 수레로는 그들이 말하는 운거 외에, 전에 보지 못했던 엄청난 크기의 수레인 이른바 대운거(大雲車) 두 대가 포함되었다. 

진시황이 자신에게 충성을 바쳤던 완옹중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던 열두 개의 금인 가운데, 두 개를 가지고 가도록 했기 때문이다.

금인을 운반하는 대운거는 길이가 최소한 6장(丈)은 되어야 했다. 

금인의 키가 5장이었기 때문에 그 정도도 크다고는 할 수 없었다. 대운거의 폭은 1장 2척이었고, 바퀴는 좌우 각각 12개씩 도합 24개가 달렸다.

금인을 안정감 있게 눕힌 상태로 운반하기 위해서는 폭이 2장은 넘어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만큼 넓은 노폭이 필요하기 때문에 길을 닦기에 너무 힘들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최소한의 폭으로 줄인 것이 그 정도였다. 

그 대신 금인은 편안히 하늘을 보고 누운 자세가 아니라, 비스듬히 모로 누운 자세로 그 먼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금인을 운반하는 수레는, 앞쪽에서 말이 한 줄에 네 필씩 서서 열 줄의 말이 끄는 형태로 만들어졌으니 수레 한 대를 40 필의 말이 끄는 형국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혹시라도 힘든 경사로를 만났을 때는 인력을 동원해서 밀거나 당기기 쉽도록, 수레 옆에는 5척 간격으로 팔뚝 굵기의 구멍을 뚫어두었다. 필요하면 그곳에 기다란 말뚝을 끼우고 그것을 손잡이 삼아 말뚝 하나에 세 사람씩 붙어서 밀거나 당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금인은 그 자체 무게만 해도 24만 근이나 되는 데다 크기가 5장이나 되었으니, 그것을 실은 수레 무게까지 합치면 실제로 말이나 사람이 끌어야 하는 중량은 25만 근이 넘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동원된 나머지 500여 량의 수레는 모두 일반 짐수레와 같은 크기로 제작되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수레를 끌고 가는 군사들은 하나같이, 금인을 실은 대운거보다 짐을 실은 보통 운거가 오히려 더 무겁다고 불만이 자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운거에 실린 나무 상자에는 진시황이 그동안 모아두었던 온갖 보물들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금인이 쇳덩어리라고는 하지만 속이 비었으니, 작은 수레지만 속이 꽉 찬 보물 상자를 실은 운거가 금인을 실은 대운거보다 결코 가볍게 여겨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500대가 넘는 수레 행렬이 함양을 출발하여 교외를 벗어나는 데 걸린 시간만 해도 꼬박 나흘이 걸렸다. 40 필의 말이 끄는 대형 수레가 대열의 선두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행군 속도가 그렇게 더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번 역사에 동원된 병력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수레를 끄느라 피로에 지친 말을 도중에 바꿔 맬 수 있는 장소를 30리마다 임시로 설치하여, 총 60개의 역(驛)을 두었다. 

뿐만 아니라 금인을 실은 대운거는 지금까지 없던 대형 수레였기 때문에, 기존에 있던 도로나 교량을 그대로 이용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원정대 스스로 계곡이나 하천을 건너는 데 필요한 교량을 건설하거나 숲의 나무를 베어 길을 내는 것은 물론, 높고 험한 산을 만나면 우회하기 위해 새로이 길을 내기도 하면서 나아가야 했기 때문에 이러한 작업을 위해 동원된 군사들의 수효는 거의 30만에 이르렀다.

이미 이들은 원정대가 출발하기 6개월 전부터 주요 지점에 배치되어 교량과 도로를 건설하고 있었다. 

만약 원정대가 그 지점에 도착할 때까지 필요한 시설이 완성되어 있으면 후한 상을 받을 것이로되 그렇지 못하며 전원 그 자리에서 생매장당할 것을 각오하고 시작한 대역사였다.

이 모든 역사는 대운거 두 량에 실린 황제의 특별 하사품, 즉 금인을 무사히 옮겨야 하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진시황은 서불의 원정대가 삼신산에 가서 불로초를 구하게 되면 그곳에다 진나라를 상징하는 건축물을 세우고 제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라는 명령을 내려두었는데, 바로 그 자리에 세울 신상(神像)으로 정해진 것이 이 금인이었던 것이다.     

10월에 수도 함양을 출발한 행렬이 겪은 어려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미리 진로를 예상하고 어느 정도 둘러가는 경우가 있어도 가능한 한 평지를 골라 간다는 원칙을 세웠기 때문에 산을 넘는 경우는 적었지만, 상대적으로 강을 건너는 경우가 많았다.

상류로 올라가면 강폭이 좁아져서 교량을 설치하기는 쉬웠지만 대신에 험한 길을 만나야 했고, 그 문제를 벗어나려면 어쩔 수 없이 대형 교량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험한 계곡에 길을 닦고 교량을 설치하면서, 물에 빠져 죽고 절벽에 떨어져 죽고 무거운 바위나 아름드리나무둥치에 깔려서 목숨을 잃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천신만고 끝에 이 대규모 행렬이 중간 목적지인 봉래 포구에 도착한 것은 함양을 떠난 지 8개월 뒤였다. 

가을에 출발한 행렬이 겨울을 지나고 봄을 길에서 맞이하더니 여름에 접어들어서야 겨우 계획된 중간 지점에 도달한 것이다.

수레에 실린 물건은 두꺼운 천으로 여러 겹을 덮은 다음 밧줄로 튼튼히 묶은 상태로 움직였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원정대의 짐이 많은 것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일반 백성들 가운데 간혹, 불로초를 찾는 데에 왜 그토록 많은 짐이 필요한지에 대해 궁금해하면서 끼리끼리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서불은 상자 속에 들어 있는 물건이 최종 목적지인 삼신산에 도착해서 사용할 특수 연장이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수레의 크기에 비해 수레바퀴 자국이 유달리 깊이 나는 것으로 보아 그것이 아주 무거운 것일 거라는 사실만 짐작했을 뿐, 그 속에 보물이 들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실제로 보물을 상자에 담는 작업은 진시황의 무덤을 건설하고 있던 작업자들 가운데 일부가 동원되어 쥐도 새도 모르게 이루어진 일이었고, 그 작업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중간에 매복하고 있던 군사들에 의해 한 명도 남김없이 살해당했기 때문에 그 상자에 어떤 물건이 들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원정대 가운데 서불이 유일했다.     

봉래 포구에는 이미 선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함양에서 봉래까지 오는 수레가 그러했듯 봉래에서 동쪽을 향해 떠날 선박도 그에 못지않게 크고 호화로웠다. 그 배는 명색이 바닷가에서 어부로 평생을 살았다는 봉래 주민들도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크고 튼튼해 보였다.

배에는 수십 장(丈)이나 되어 보일 정도로 까마득히 높은 돛대가 세 개나 달려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신기한 듯 몰려들어 구경을 하면서 이것저것 물어보았으나 그들이 알아낸 건, 그 배가 옛날 오(吳) 나라 지역에서 만들어졌다는 것과 곧 불로초 원정대가 도착하면 그들을 태우고 동쪽 삼신산으로 출항할 것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배는 대략 세어봐도 100척이 넘었는데, 그중 두 척은 그 형태부터 아주 생소한 것이라서 처음에는 그것이 배라는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순(舜) 임금이 타던 배의 이름을 따서, 서불은 그 배의 이름을 각각 여(艅)와 항(航)이라고 지었다. 

그 배는 넓은 조련장처럼 생겼는데, 길이가 20장에 폭이 10장이나 되는, 얼핏 보면 직사각형 모양의 커다란 판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면 앞부분을 뾰족하게 돌출시켜 항해할 때 물의 저항을 적게 받도록 용의주도하게 만들어진 배였다.

뿐만 아니라, 갑판을 빙 둘러 사방으로 어린아이 팔뚝만 한 쇠말뚝을 박아 동아줄을 매기 쉽도록 만들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배는 금인을 싣기 위해 특별히 제조한 것이었다.

이곳 봉래 포구부터는 호송하는 군대도 없이 오로지 불로초 원정대만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불로초를 구하러 가는데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필요했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동쪽 어딘가에 있다는 삼신산에 이르면 이 크고 무거운 금인을 옮겨 세우고, 그 많은 상자를 옮길 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던 것이다.     

서불 일행은 봉래에서 약 한 달 이상을 더 머물러야 했다. 

500량의 운거에 싣고 온 짐은 물론이거니와,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그들의 원정에 소요될 식량과 물자들을 100척의 배로 옮기는 일이 간단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힘든 가운데서도 그토록 무겁고 큰 금인을 배로 옮겨 싣는 일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우선 배를 육지에 바짝 붙여야 금인을 옮길 수 있다는 생각에 특별히 만든 여와 항을 최대한 가까이 당겨서 단단히 묶었는데, 막상 금인을 싣고 보니 수심이 너무 낮아 배가 바닥에 닿아버렸다. 서불은 궁리 끝에 바다 가운데를 향해 200 보나 되는 길이의 부교를 설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부교를 만들기 위해 봉래현은 물론 인근 고을에 있는 배까지 동원했다. 게다가 배 옆까지 옮긴 금인을 다시 배 위로 둘러 옮겨서 안정시키기 위해 아름드리 통나무 200여 개를 산에서 베어 날라야만 했고, 금인을 배에 묶어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어부들이 배를 묶는 데 쓰는 밧줄을 네 가닥이나 겹쳐서 굵은 동아줄을 엮는 작업도 필요했다.

금인을 실은 배를 끌기 위해 금인선 하나에 각각 여섯 척의 배를 연결하여 묶고, 그 배는 항해에 필요한 필수 장비 외에 일절 짐을 싣지 않았다.     

원정대도 육로에서와 달리 편제를 약간 바꾸었다. 

소거장과 조장은 그대로 두되, 이번에는 각 조장이 한 척의 배를 총괄하는 함장의 역할을 맡았다. 물론 항해와 관련된 기술적인 문제는 오나라 사람들이 모두 맡고 있었기 때문에, 조장은 항해 중 동남동녀들의 생활과 규율을 관장하는 정도였다.

다만 특별한 것은 금인선을 싣고 가는 이른바 금인 선단을 책임지는 대조장(大組長)을 새로 임명했다는 점이었다. 대조장은 5000명의 동남동녀 가운데 가장 건강하고 두뇌가 명석한 인물을 골라 두 사람을 선정했다.     

천신만고 끝에 원정대가 봉래항을 떠난 것은 음력 8월에 접어들어서였다.

장마철에 비가 오면 땅이 질척거려서 수레가 움직이기 어려울 것이라 하여, 서둘러 함양을 떠난 날이 찬바람이 일던 지난해 10월이었으니 거의 열 달이 걸려서야 드디어 바다로 들어선 것이다.

지금부터 삼신산에 이르기까지의 뱃길은 오로지 동명(董冥)의 손에 달렸다. 

당시의 일반적인 항해술이란, 아주 단순한 소위 연안 항법(沿岸航法)이었다. 

즉 산둥반도의 봉래항을 출발하여 한반도 남해안으로 항해를 할 경우, 대부분은 발해만을 돌아서 한반도의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항로를 택했다. 눈에 익숙한 육지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오는 것이 안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시간이 많이 걸렸고, 육지에 거점을 둔 해적들이 출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위험도가 높았다. 그래서 서불 일행은 산둥반도에서 한반도의 남해안을 향하는 직항로를 선택했다. 

보통의 선박은 거의 선택할 수 없는 험로였으나 서불 일행은 그들의 뱃길을 안내할 동명이란 인물을 믿었기 때문에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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