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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술북스 Mar 18. 2021

“결혼한 보통 남자의 여자”라는 표현에 대하여

편집자의 눈으로 책읽기

가끔 몇몇 책들은 저자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을락 말락 줄타기를 해서(혹은 선을 넘어서) 나를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조던 피터슨 아저씨가 쓴 책 『12가지 인생의 법칙』(메이븐, 2018)이 그렇다. 3억 5000만 년 넘게 이 땅에 살고 있는 바닷가재를 칭송하며, 이 동물의 서열 구조가 “생명체의 생존과 적응에 필수적이었다”느니 “대자연의 섭리”라느니, 그것을 인간이 본받아야 할 삶의 지혜라고 주장하는 글을 읽으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좋아서가 아니라 불안해서. 과학적으로 근거가 부실하고 논리적으로 ‘오류’인 이런 주장을 이렇게 당당하게 책에 쓰다니, 이 사람은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보다(피터슨 아저씨의 주장이 왜 틀렸냐 하면… 간단히 말해서 인간은 바닷가재가 아니다!).


‘혐오표현’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이 질문이 불편하다』(어크로스, 2019)의 서문에 등장하는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미래를 꿈꾸는 것은 정신병 초기 증세다”라는 명언(?)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우리는 평소에 멋모르고 이렇게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나 행동을 정신병에 빗대곤 하는데, 이는 실제 정신병을 앓는 사람에게 대단히 모욕적일 수 있으며 정신병에 대한 편견을 재생산할 수도 있다(정신병혐오; 이를테면 우리는 ‘정신병자’라는 말을 욕설로 사용한다).



나라면 이렇게 글을 쓰지 않았을 텐데. 이런 위험한 표현을 책에 싣다니, 편집자로서 손발이 덜덜 떨린다. 물론 『12가지 인생의 법칙』의 경우든 『나는 이 질문이 불편하다』의 경우든 독자에 따라서는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오류나 혐오표현을 민감하게(안 좋게) 받아들일 독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그러니까, 위험하다.


“결혼한 보통 남자의 여자”라는 표현을 발견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소름이 돋았다. 다양한 수학자와 과학자들을 소개하는 책, 『어쩌다 과학』(더퀘스트, 2021)이라는 과학 교양 만화를 읽던 중이었다. 우선 ‘에르되시 팔’이라는 헝가리 출신 천재 수학자에 대한 설명에서부터 묘한 낌새를 느꼈다.


에르되시는 수학 외의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괴짜로도 유명하다. 작은 가방에 옷 몇 벌과 수학 노트만을 가진 채, 수학자들의 집에 머물며 집 주인과 함께 연구하고 논문을 완성하면 다음 수학자를 찾아 나섰다. […] 수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협력 연구의 모범이 된 에르되시. 하지만 그와 연결된 수많은 사람 중에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으니……. 그는 평생 독신이었다.


도대체 ‘여자’ 이야기가 왜 튀어나올까? 여자를 만나고 못 만나고가 이 학자의 수학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사항이었을까? 아니, 튀어나올 수는 있다. 하지만 그다음에 말줄임표로 말끝을 흐리며, 마치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것이 애석하다는 양 묘사하는 게 이 학자에 관해 들려줄 만한 중요한(재밌는) 정보였을까?


전형적으로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많은 공대에 다닐 당시, 그나마 여학생이 많았던 학과인 생명공학과는 당시 ‘꽃밭’이라고 불렸다. 반대로 거의 3년에 1명꼴로 여학생이 들어오는 물리학과 같은 다른 학과는 ‘텃밭’이었다(여자를 꽃에 빗대는 표현의 식상함과 역겨움은 양해해주시길. 과거의 일이다). 그런 점에서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알게 모르게 생명공학과에 대한 약간의 동경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명공학과 친구들에게 너네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거기 들어갔냐고 말하면 어찌 될까? 생명공학과에 들어간 주된 이유는 생명공학이 좋고 생명공학자가 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여자’를 들먹이면, 그 친구들의 꿈을 무시하는 처사일 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는 여학생들을 단순히 만남을 위한 도구로 취급하는 일이다. 에르되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수학자는 어떤 마음을 품고 수많은 학자와 연결되어 협력 연구를 했을까? 분명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부분을 읽을 때,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여성 수학자도 있었을 텐데 왜 그들은 에르되시와의 협력 연구에서 배제되었을까?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순진하고, 아이같은 성품의 소유자”이며 “누구든지 그의 마음에 드는 주제를 가지고 온 수학자라면 함께 논문을 썼”다던데.


이를테면 『숙녀들의 수첩: 수학이 여자의 것이었을 때』(들녘, 2019)라는 수학 교양 만화에서는 과거부터 최근까지도 이어진 “여자는 수학과 어울리지 않는다”라는 편견에 저항하며 다양한 여성 수학자들을 소개한다. 글쎄, 에르되시 아저씨가 살았던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과 연결된 여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건 그러한 편견의 영향도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면서 애석함을 느끼게 된다.


여성에 대한 편견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에서 비롯한 나의 애석함과, 단순히 남성 수학자 에르되시 팔이 평생 여자를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책의 애석함이 서로 어긋날 때 묘한 느낌이 들었다. 내 상상력이 너무 지나친 걸까? 그냥 ‘웃고 넘어가면 되는 것’일 수도 있다. 괜히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자 하고선 페이지를 넘겼다.


이어서 소개되는 학자는 그 유명한 에르빈 슈뢰딩거! 그는 결혼을 하고서도 이 여자 저 여자와 바람을 피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 이 책은 또다시 ‘여자’ 이야기를 한다.


“재미있는 건, 슈뢰딩거의 이런 사생활과 그가 연구한 양자역학의 세계가 (파동 방정식도 양자역학에 속함) 비슷한 면이 있다는 것!”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이 적용되는 전자 등은 입자뿐 아니라 ‘파동의 성질’을 함께 갖는다. 그럼, 입자와 파동의 성질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면….

입자는 어떤 장소에 있거나(확률 100%) 없거나(확률 0%) 둘 중 하나이다. 하지만 파동은 여러 위치에 분포해 있다. (가령, 어떤 장소에 50% 존재하고 거기서 점점 멀어지면서 점점 낮은 확률로 분포.)

“그러니까 다시 슈뢰딩거로 비유하자면, 파동은 슈뢰딩거의 여자, 입자는 결혼한 보통 남자의 여자(부인)의 성질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입자=결혼한 보통 남자의 여자
결혼한 남성의 경우, 일반적으로 자기 가정 안에 부인이 있고(확률 100%) 가정 밖에는 부인이 없음(확률 0%)

파동=슈뢰딩거의 여자
슈뢰딩거는 자기 가정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만나는 여자가 존재. 따라서 슈뢰딩거의 여자들은 슈뢰딩거가 세상에 내놓은 파동 방정식의 대상인 전자처럼 입자가 아니라 파동의 형태를 띠고 여러 곳에 분포해 있음.

“가수는 자기가 부르는 노래대로 산다는데, 과학자도 자기가 발견한 이론대로 사는 걸까요?”


‘여자’를 이런 식으로 사용한다고? 슈뢰딩거(남성)의 관측(불륜) 대상으로서 수동적으로 입자(여자)를 묘사하고, 게다가 확률 100% 가정 안에 부인이 있다며 꽤나 가부장적으로 들릴 만한 소리를 한다(어째서 가정 밖에 부인이 있을 확률이 0%인가? 부인은 절대 바람을 피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가? “결혼한 보통 남자의 여자”니까?).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를 함부로 하는 것이 문제시되고 성 인지 감수성의 향상과 함께 주체적인 여성상이 강조되는 오늘날, 이러한 표현은 ‘여성혐오’일 우려가 있다. 굉장히 위험하다.


이런 표현이 무조건 잘못이고 쓰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리스크가 너무 크다. 독자가 불쾌하게 받아들일 가능성, 더 나아가 그 불쾌감으로 인해 책과 저자의 품격이 손상될 가능성이 크다(판매에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더욱이 그런 리스크를 감수할 만큼 저 표현이 정보를 잘 전달하는지도 의문이다. 한 입자가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입자성과 파동성)을 갖는다는 이중성을 설명하는데, 각각의 성질을 서로 다른 여자에 빗대고 있다(입자=결혼한 보통 남자의 여자, 파동=슈뢰딩거의 여자). 굳이 ‘여자’를 써먹는다면, 서로 다른 여자가 아니라 한 여자의 이중적인 모습에 빗대야 했다(모든 물질은 두 가지 성질을 동시에 갖는다).


“결혼한 보통 남자의 여자”는 정확한 정보 전달에도 실패하고, 솔직히 재미도 없고, 그러면서 리스크는 겁나게 큰 표현이다. 내가 쓸데없이 예민한 걸까? 사실 책을 만들 때 편집자가 누구를 예상독자로 설정했느냐에 따라 리스크 판단은 달라진다. 어쩌면 『어쩌다 과학』은 그런 표현에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페미니즘에 관심 없는 사람?)을 독자로 예상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편집자의 예상을 뛰어넘어 불특정 다수의 독자가 이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내가 그런 예상치 못한 독자일 것이다.


(흠… 이거 나만 불편해?)


『어쩌다 과학』, 지이·태복 지음, 이강영 감수, 더퀘스트,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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