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랑은 겨울잠, 자는 중
화려하거나 세련되지 않은 우리 집에도 크리스마스트리 하나가 놓였다. 반짝이는 전구들이 주는 따뜻함은 미세하리만큼 내 심장 끝을 간지럽혔다. 연말이 주는 설렘과 기대감 보단, 한 해가 마무리 되었다는 아쉬움과 한 살 더 먹는다는 두려움만이 공존하는 걸 보면서 나에게 연말은 어떤 느낌인지 깊게 들여다보았다.
나 역시 20년 만의 동창회 모임, 친한 지인들과의 만남, 시댁 방문, 친정 부모님 초대 등 12월 한 달에 잡힌 약속만 대여섯이다. 평소에는 집 밖에 잘 나가지 않는 내가 '연말'이라는 이유를 앞세워 활동을 시작하는 건, 겨울잠을 자기 위해 미리 에너지를 보충해 두는 다람쥐와 비슷한 마음이다.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얻는 반가움과 즐거움의 기운을 가득 받고 싶었다.
만남, 관계, 즐거움이라는 카테고리를 따라가다 보니 내가 진짜 원하는 건 '사랑'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슬퍼졌다. 연인관계에서 늘 '을'의 편에 서있던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에도 [사랑하는 자]와 [더 사랑하는 자]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금 비극적으로 표현하면 [갑]과 [을]이 있는 것 같다.
나 스스로를 [을]이라고 표현하는 건 상대에게 나의 시간, 돈, 노력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상대의 기분을 살피고, 평소에 흘린 듯이 한 말들도 기억하여 기념일에 그 물건을 바쳤다. 내 머릿속은 오로지 사랑하는 그 님으로 가득했다. 상대방을 돌봐주는 것, 상대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통해 내가 세상에 필요한 존재임을 증명해 냈다.
생각해 보면 나는 화려한 스펙을 가진 이들보다, 돌봄이 필요한 이들에게 빠져들었다. 학교 반장보다는 육성회비를 못 내서 수업이 끝난 뒤 남아야 하는 아이, 도시에 있는 대학에 다니게 돼서 학교 기숙사에 살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골 아이, 친구 한 명 없이 홀로 동아리에 들어와 매일 합창연습을 빠지지 않는 아이.
사랑이 평등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주는 만큼 받고 싶었고, 내가 하는 만큼 상대도 해주길 바랐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로부터 "난 평생 널 절대 떠나지 않을 거야. 맹세해." 서약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주는 사랑으로 과식(過食)한 그들은 탈이 나서 떠났고, 소식(小食)으로 말라가던 나는 '너무 사랑하면 이렇게 굶게 되는 거야. 그러니 적당히!'라며 잘못된 믿음을 새기게 되었다. 그 후로 , 내가 가진 사랑의 마음을 차고 넘치게 주어야 충만했던 이가 '적당한' 기준을 지키며 유지했던 만남들은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신념이 곧 우리가 사는 세계를 만든다고 한다. 나의 경우 나를 떠날까 봐, 아니 버릴까 봐 무서워서 그들을 붙잡는 수단으로 썼던 나의 무기, 넘치는 사랑의 결과로, 외로움만이 가득한 세계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때, 크리스마스트리 안 쪽에 홀로 불빛을 깜빡 거리는 전구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사랑했기에 외로웠다는 너에게, 그 사랑이 어디서 왔는데? 그 출발점을 떠올려봐. 너무 깊숙이 들어앉아있어서 보이지 않을지라도 말이야.]
[출발점.... 출.. 발.. 점... 사랑의 시작을 말하는 거야?]
[시작일 수도 있지]
[시작이라면 내가 태어난 거.. 일 텐데, 부모님의 사랑일까? 그런데 난.. 부모님의 사랑이 잘 기억나질 않아. 오히려 속상하고 아쉽고 힘들었던 일들만 떠오르는데..]
[내가 얘기했잖아. 깊숙이 있다고. 기억은 말할 것도 없지. 네가 존재했던 이유,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던 이유, 네가 살아왔던 이유, 그 모든 것은 보이지 않아. 그래서 우리는 착각해. 눈에 보이지 않으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이야. 가끔은, 너무 사랑하는 건 말로도 표현할 수 없어. 하지만 내 몸 어딘가에는 새겨지게 돼. 누군가는 사랑을 볼 줄 아는 눈으로 귀로, 그리고 마음으로도.]
사랑을 볼 줄 아는 이들이 내 앞에 가득했다는 걸, 지금도 내가 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전화를 걸고 싶어졌다. 나를 열 달 동안 품어주고 수십 년간 나를 돌봐줬던 첫사랑, 나의 엄마 그리고 아빠.
연말은 그런 것 같다. 겨울잠을 자면서 잃어버린 사랑을 깨우는 시기, 그 힘으로 다시 봄을 맞이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연말에 활동을 시작하려는 우리의 몸은 얼마나 자연스럽고 위대한 일인가. 지금 이 순간 당신도 마음껏 활동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