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 다이어리

4. 죽음에 대해 알고 싶은 미성숙한 어른이야기 - 셋

by 생쥐양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이야기 창고를 가지고 있다. 나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이야기 주제(공부, 육아, 직장, 인생, 책 등)를 선정하고 나만의 마지노선을 정한다. '여기까지만 말할게'


한마디로 난 '비밀스러운 소녀' 역할을 유지하며 10대와 20대를 보냈다. 그래서인지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일기를 썼다. 그 안에는 온갖 악당들, 마녀들이 등장하고 슬프고도 비참한 이야기들이 흘러넘쳤다. 기승전결 없이 전개되는 이야기들은 그 일기장안에서만 살아 숨 쉬고 있을 뿐 세상에 고개 내밀지 못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나를 편하게 해 주었다.


나의 30대는 취업, 결혼, 육아의 삼박자를 고루 갖춘 인생의 종합선물세트 같았다. 그 세 가지를 위해 내가 그렇게 달려왔구나 싶을 정도로 황금기 같은 시절이었다. 반면에 나의 창고는 들여다보지 않은 시간만큼 황폐해져 갔고 결국 메말라 썩어버렸다.


한마디로 지금의 난,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경험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 채 길을 잃었다. 그 기억을 간절히 찾고 싶은 바람을 지닌 채 세 번째 수업이 시작되었다


강사는 물었다 "우리는 지난 시간 동안 내가 경험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 외에 지금 이 순간 떠오른 죽음이 있을까요?"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보고 헤집어보아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때, 어떤 수강생 한 분이 "오늘따라 유난히 복부 부분에 통증이 있었어요. '왜 갑자기 배가 아프지?' 하며 잠시 생각해 보니, 10년 전에 낙태했다는 사실이 떠올랐어요.. 네.. 저는 낙태를 했어요."라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분의 어두운 고백 뒤로, 수업에 참여한 수강생들은 침묵으로 그분의 떨림에 공감을 하기도 하고 위로를 건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숨이 멎었다. 그리고 2019년 4년 전, 내가 묻어두었던 그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죽을 때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던 나의 다짐. 너무 깊은 곳에 잠식해 있어서 튀어나올 때도 내 오장육부를 뒤틀며 기어 나오는 나의 이야기 말이다.


2019년은 연년생 삼 남매를 키우며 어느덧 '엄마 자리'가 꽤나 편하게 느껴졌던 해였다. 조금씩 손이 덜 가는 첫째와 둘째에 비해 막내는 걸음마도 못 뗀 아기였지만 내 나름대로 육아의 현장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봄의 기운이 꺾여가던 계절에 우리 부부에게 네 번째 임신이 찾아왔다.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나에게 찾아온 생명은 태명 하나 얻지 못하고 '고민거리'가 되었다. '내가 지금 이 아이를 낳아서 잘 키울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의 꼬리를 무는 질문 속에 파묻혀서 일상을 살아내지 못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인 것 같았다. 신랑을 원망하고, 나를 미워하고, 세 아이를 돌보지 못했다. 분명 길을 잃었는데 24시간이 매일 돌아가고 있는 게 신기해서 세탁기만 덩그러니 놓인 다용도실에 들어가 몸을 기대곤 했다. 윙윙 거리는 그 소리에 맞춰 내가 울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 것 같아서 편안했다.

어떤 이끌림이 있었는지, 삼 남매를 낳은 엄마의 익숙함이었는지 모르지만 4주째가 되어 찾아간 산부인과에서 초음파를 통해 손톱만 한 아이를 보았다. 세 아이 모두의 출산과 진료를 봐왔던 산부인과 원장님은 "넷째 임신 축하드립니다"라며 축복을 건넸지만 그녀에 대한 나의 대답은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왔다. "저... 원장님... 혹시... 병원... 아시는 데 있나요?"

우리 사이는 책상 하나와 모니터 두 개뿐이었지만, 그녀는 나와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들어보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두 분이 성인이시면 피임을 하셨어야죠. 여기 와서 그런 걸 물어보시는 게 말이 되나요?"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얼어있어서 온몸이 굳어졌다. 그녀는 두 개의 산부인과를 내뱉었고, 나는 차가운 공기의 문을 닫고 나오면서 병원명을 중얼거리며 눈물을 꾹 참고 배를 어루만지며 나왔다.


그 이후로 일주일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아마도 평범한 일상처럼, 삼시 세끼를 먹고 아이들과 놀이터를 가고 새벽에 막내 분유를 타면서 보냈을 거로 추측된다. 그리곤 다용도실에 들어가 병원을 검색해 보고 낙태에 대한 글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와 관련된 글이나, 정보는 없었다. 낙태 후에 몸의 이상반응이나, 정신적인 고통, 산후조리 방법 등 내가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건 타자(打字)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남편도 회사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틈만 나면 전화를 걸어 나의 안부와 상태를 물어왔고, 미안하다며 사과를 되뇌고, 어떤 결정이든 같이 하자며 혼란스러운 자신의 감정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남편을 보니 이 '고민'은 나만이 할 수 있는 '결정'인 것 같았다. 10달의 임신생활과 그 후의 변화들을 내가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부는 계속 대화를 나눴다.


어느 날 아침, 첫 출산 후 몇 년째 잘 펴지지 않던 10개의 손가락들이 그날따라 더 잘 펴지지 않았다. 툭 튀어나온 손등의 핏줄들 사이로 새벽에 잠을 푹 잔 적이 언제였는지, 젖병소독은 얼마나 더 해야 하는지, 내 몸은 언제쯤 회복될 수 있을는지 막막함과 답답함이 비쳤다. 그때 남편에게 또 전화가 왔고 얼마나 많은 고민과 생각 뒤에 내린 결정이었는지, 그의 목소리에 당당함과 희망이 내려졌다.

[여보, 내가 계속 생각해 봤는데, 우리가 지금보다 더 힘들어지더라도 한번 낳아보자. 여보한테 낳으라고 말해서 미안해. 내가 지금보다 세 아이들도 더 많이 육아하고, 새벽에는 출근하기 전까지 막내 분유며 이것저것 담당할게. 또... 또... 내가 할 수 있는 게 머가 있을까? 음...]

수화기 너머였기에 가능했던 말, [여보 나는.... 못 낳을 것 같아. 미안해...] 나는 그에게 어둠으로 답하였다.


수술실에서 나온 후로 함께 집으로 향하던 남편과 나는, 그 후로 오랫동안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가끔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쯤 100일이겠구나. 돌이 되었겠구나'하고 말이다. 엄마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치듯 그 아이를 기억하는 것뿐이었다.


내 주변 친구들 중 자연 유산을 했거나 아이를 더 낳고 싶어서 시험관 시술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나의 낙태사실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어른으로서 무지하고 무능하여 죄를 저질렀다는 고해(告解)로 인해 어떤 벌을 받을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침묵하였고 죄책감도 깊이 묻어두었다.


[선생님께서는 그 당시의 선택을 떠올리면 어떤 느낌과 생각이 떠오르나요?]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나중에 벌 받겠다'라는 생각이 떠올라요. 그래서 창피하고 두렵고 무서워요]

[그 이유는 무엇이죠?]

[그 아이는 원하지 않았는데 태어났고 죽었거든요. 부모의 무능으로 그렇게 된 거라 생각해요.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 나쁜 짓이었던 것 같아요. 전 살면서 무단횡단도 하지 않을 정도로 하지 말라는 건 안 하며 그렇게 살았는데... 갑자기... 마음이 너무 아파요... 그 아이는 얼마나 아팠을까요.. 너무 아팠을 거 같아요... 제가 그렇게 한 거잖아요.. 제가...]

[벌 받겠다는 생각을 깊이 들여다볼게요. 그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제가 나중에 커서 결혼하면 아이가 하나고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요. 물론 미신이라고 여겼지만 무의식 중에 그 생각이 자리 잡았나 봐요. 근데 전 지금 아이가 셋이고, 몇 년 전에 낙태를 했어요. 내가 받게 될 벌이 아이들이 아프거나 다치는 거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이 있던 것 같아요. 생각해 보니, 그래서 아이들의 안전을 지키는데 엄청난 에너지를 쓰며 살고 있는 것 같아요]

[미신이지만 그걸 떠올리면 어떤가요?]

[제가 어릴 때 유달리 아들을 많이 혼냈던 기억이 나요. 그때 아이가 세 살 때였는데 감정적으로 화도 많이 냈고 혼낼 때도 손으로 엉덩이를 때리기도 했어요. 넷째를 임신 중이었는데 저도 모르게 뱃속의 아이가 아들일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낙태를 했다는 괴로움과 수치심을 제 아들에게 투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이 남편과 함께 수술실에 들어갔던 온 하루 일과를 얘기해주실래요?]

[평일에 남편이 하루 휴가를 받았는데 오전에 아이 셋이 유치원을 가는 시간이라 수술시간을 평일 오전으로 잡았어요. 그렇게 오후가 다 돼서 집에 돌아와서는 아이들 하원 시간이 돼서 아이들과 남편과 집에 있었던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미역국을 먹는 등 산후조리는 하셨나요?]

[아니요. 특별히 산후조리는 안 했어요. 남편이 아이들을 챙기는 동안 방에서 잤던 것 같아요]

[선생님이 낙태를 선택했을 때 충족되지 않은 욕구는 무엇일까요?]

['네가 태어난 걸 축복해'라며 그 아이를 제 아이로 받아주지 못했어요]

[선생님은 무엇을 지키기 위해 그 선택을 했을까요?]

[세 아이를 잘 돌보고 싶었어요. ]

[너의 탄생을 받아들이는 건 '사랑'일까요?]

[네...]

[아이 셋을 잘 돌보고 싶던 건 '사랑'일까요?]

[네... 맞아요...]

[선생님께 제안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남은 연말의 시간 동안 자신을 위해 '산후조리 하듯' 살아보세요. 나를 위해 미역국도 끓여주고, 외출은 삼가고 내 몸을 따뜻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촛불 하나를 사서 남편과 함께 그 아이를 위해 기도를 해주세요.]

[그렇네요... 그런 시간들이 필요했던 거 같아요. 그리고 그 아이에게도 '태명'을 만들어서 불러주고 싶어요. 돌아올 회, 회복할 복 "회복(回復)"이라고 지어볼래요. 그 아이를 통해 제 몸과 마음도 회복하고, 그 아이도 제 기도를 통해 회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다시 돌아서 만나기를. 그렇게 바라고 싶어요.]


누군가의 고해성사로 4년간 묵어두었던 눈물과 곡소리가 흐르자 알게 되었다. 사실은 나 또한 나의 죄를 고백하고 싶었고 용서받고 싶었다는 걸 말이다. 한동안 나는 많이 울고 많이 아플 것 같다. 노래를 듣다가도, 운전을 하다가 그리고 밥을 먹다가도 그렇게 차곡차곡 몸 속에 쌓인 슬픔을 흘려보낼 것 같다.

나는 내가 고백한 글들이 나 혼자만의 일기가 아니길 바란다. 누군가가 읽어주고, 같이 울어주고, 함께 위로하며 바람이 되어 하늘끝까지 닿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미혼이든 기혼이든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내가 드러내지 않은 것처럼 그들도 드러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고백과 내가 진행한 상담세션의 타자(打字)를 통해 우리가 모두 회복하기를 응원해 본다. 슬픔을 고백하는 자가 행복을 잉태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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