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 다이어리

5. 죽음에 대해 알고 싶은 미성숙한 어른이야기 - 넷

by 생쥐양

며칠 전, 친한 언니의 아버지가 뇌출혈로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들렀다.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는데도 자식이 많으니 장례 절차도 어렵지 않게 하게 되더라",

"살아계실 때 부모님께 잘해드려, 돌아가시니 후회되는 거밖에 생각이 안 난다",

"그래도 미우나 고우나 배우자가 최고야. 자식들은 지들 자식들 챙기랴, 일하랴, 부모들 챙길 겨를도 없잖아", "듣지도 못하는 아버지 귀에 대고 온 가족이 사랑한다고 목 놓아 외치는데, 그 말이 뭐가 그리 아깝다고 그렇게 못하고 살았나 모르겠다. 뭐가 그리 아깝다고..."


부모님은 내가 스무 살이 되고 몇 달이 넘어가던 해에 이혼하셨다. 별로 놀랍지 않았던 건 내 나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침도 거르고 아무 인사 없이 일하러 나가는 아빠의 뒷모습, 중학생 딸내미 공부해야 하니 밖으로 나가자는 엄마의 뿔난 목소리, 같이 사는 게 힘들어 보이는 부부의 몸짓과 표정은 그렇게 어린 자식에게 '이별'이 올 거라는 미래를 점 지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부모님의 이혼은 쉽게 수긍되었고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아픔을 잘 참는 아이였던 것 같다. 참는다는 건 드러내지 않고 살아간다는 의미였다. 무섭고 슬픈걸 '표현'하지 못했기에 사랑하는 것 또한 드러내지 못하는 비극적인 현실을 '죽음'을 배워가면서 알게 되었다. 죽음이 다가와야 사랑을 외치게 되는 후회와 용서의 메아리가 나에게도 일어날까 봐 두렵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살아 계셔 줘서 감사합니다.]

[저를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말이 내 가슴에서 일렁거리며 목구멍을 타고 나올 때 '멈칫'하는 불편함을 느낀다. 외친다기보단 토해내는 메스꺼움이 나의 아물지 않는 상처에 닿아 어깨와 고개를 떨구게 했지만, 나는 끝까지 배우고 싶다. 원래 내 안에 가득했던 사랑의 에너지가 눈에서 귀에서 그리고 입에서 흘러넘칠 때까지.


강사는 물었다.

"저희가 만나지 벌써 네 번째. 수업의 절반을 달려왔습니다. 선생님들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무엇이 떠오르나요?"

나에겐 단어 자체가 주는 어둡고 무서운 기운이 느껴졌다. 떠오르는 색깔은 검거나 빨간색이 떠올랐다. 왜냐하면 각종 사건사고가 연관되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삶에서 어떤 게 중요해서 그런 걸까요?"

내가 살고 있는 공간, 만나는 사람, 즉 내가 사는 세상이 안전하다고 느끼고 싶다. 내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은 "세상은 안전하지 않다"라고 여기고 있다. 불안한 세상 속에서 안전해지기 위해 내가 쓰는 에너지는 80프로 정도 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무단횡단 하지 않기, 속력 지키기, 엘리베이터 타지 않고 계단 걷기, 주차장에서 차 타자마자 문 잠그기 등 장소별로 내가 정한 규칙들이 있다.

내가 나열한 예시들을 들은 다른 수강생들은 그렇게 살면 너무 숨 막히지 않냐고 질문했다. 또한 같이 사는 가족들도 답답할 것 같다고 걱정해 주셨다. 그렇게 예민하게 대처하지 않아도 어디든 잘 가고 어디에서든 잘 놀고 잘 지내고 있다며 나를 염려하기도 하셨다.

물론 그들이 나를 보는 안쓰러움을 처음 받아본 건 아니다. 그럼에도 '그건 당신들이 단지 운이 좋았기 때문이에요'라고 외치고 싶은 내 마음만이 요동치고 있을 뿐이다.


"나의 에너지를 '안전'에만 사용함으로 인해 부족한 건 무엇일까요? 그로 인해 가족들이 받는 영향은 무엇일까요?"

나와 가족을 '안전하게 지키느라' 시간적, 정신적인 여유가 없는 것 같다.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직접 해야 마음이 편했다. 나의 선택은 신체적 불편과 정신적 안정감이다.

아이들에게 하는 금기사항도 많다. 혼자서 마트가지 않기, 1박 2일 학원 숙박 금지, 현관문 나갈 때 오토바이 살피기, 공중화장실 혼자가지 않기 등

나에게 다행인 건 아직 아이들이 어리기 때문에 엄마가 거는 제약들을 잘 따라주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불행인 건 새로운 걸 시도하고 도전해 볼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기질적으로 예민하게 태어났다. 친척분들이 늘 하던 말로 "네가 어릴 때 얼마나 잠을 안 자던지, 분유를 안 먹던지". 기억도 나지 않는 나의 예민함을 모두 지켜본 것 같아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부끄럽기도 하고 나 때문에 고생했을 엄마 생각에 죄송하기도 한다. 거기에 더해 나 또한 엄마로부터 금기사항이 많은 양육방식으로 길러졌다. 학생 때 연애하면 안 된다, 치미길이 줄이면 안 된다, 밤늦게 돌아다니면 안 된다, 염색하면 안 된다 등. 희한하게 성인이 되기 전까지 엄마의 말들을 잘 지키며 살아갔다. 반항 한번 해 본 적 없고, 왜 안되는지 물어본 적도 없다. 그냥 엄마말을 잘 따르는 게 나한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늘 씨앗은 싹이 되고 뿌리가 되어 돌아오는 것 같다. 나는 다 큰 성인이 돼서도 일일이 엄마에게 물어보고, 엄마의 허락을 기다리고, 새로운 걸 시도하기보단 익숙한걸 편안해했다. 엄마 또한 계속 '엄마역할'을 유지할 수 있고 자식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힘든 걸 내색하지 않으셨다.


지금 떠올려보면, 엄마가 이유 없이 부리는 짜증과 화냄은 가족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희생에 대한 증거인데도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맞물린 두 바퀴가 엉키고 설켜서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엄마와 나는 단단하게 묶여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벗어나지 못하게.


"'세상일은 막을 수 없는 거야'라는 말은 어떻게 들리시나요?"

내가 믿고 있는 세계가('세상일은 노력하면 막을 수 있어') 너무 강력해서 주변의 조언들('가볍게 살아')은 들리지 않는다.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가슴으로 내려오지 않는 게 현재 나의 상태이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부터 세상은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걸까?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20대가 생각이 난다. 대학생이 되어 동아리 활동을 하고 첫 연애를 시작하게 되면서 대학문화를 즐기게 되었다. 버스 막차시간이 다 될 때까지 동아리실에서 선배들과 동기들과 술을 마시고 시답지 않은 수다를 떨며 보냈다. 그렇게 주말이 다가오면 친한 여자동기 셋이랑 짝을 맞춰 팔짱을 끼고 화장을 하고 추억을 쌓는다는 핑계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엄마의 통제는 이제 통하지 않았다. 반항이 시작된 것이다. 세상이 마냥 재미있고 놀거리 먹을거리 볼거리 천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20대 후반이 되어 취직이라는 걸 시작하였다. 고시공부를 3년 6개월 정도 하였는데 판례(判例 법원이 특정 소송사건에 대하여 법을 해석, 적용하여 내린 판단)를 공부하며 세상에 존재하는, 그러나 전혀 알지 못했던 수많은 사건들을 접하게 되었다. 살인, 강도, 강간, 폭행 등 사건의 배경은 익숙하여 아무런 위험인지 없이 다녔던 장소들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조심성'을 기르게 되었다. 그때부터 엘리베이터를 탈 때나 공중화장실에 갈 때나 지하주차장 등을 거닐 때 나만의 안전규칙들을 만들었다.

첫째. 엘리베이터 탈 때는 비상벨 버튼 앞에 서기

둘째. 공중화장실에 들어갈 때는 문 칸마다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 출입문 자체를 잠가놓기

셋째. 지하주차장을 거닐 때는 112를 켜놓고 바로 전화버튼을 누를 수 있는 상태로 걷기

넷째. 집에 낯선 사람(통신국, 도시가스, 설치기사 등)이 방문할 때는 현관문과 창문을 활짝 열어서 도움요청 가능하게 하기 및 미리 받은 명함 사진 찍어 가족에게 카톡 보내기

누가 나한테 이런 방법들을 알려준 적도 없는데 늘 혼자서 '어떻게 하면 사고를 막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며 고안해 놓은 방법들이다. 내가 이렇게 지키고 있다고 고백하면 주변 지인들은 깜짝 놀란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피곤하게 사는 거 아니야?"라고 핀잔을 주기도 하고, 반면에 "나는 그런 생각 없이 살고 있었는데, 너무 필요한 규칙들이네. 우리 딸한테도 알려줘야겠다"라며 도움이 됐다는 사람들도 있다.


나도 사실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한 게 참으로 피곤하다. 그래서 내가 가장 편안하고 안전하다고 느끼는 장소는 '집'이다. 나는 몸과 마음이 편안해야 즐겁고 재밌다고 느끼는 것 같다. 편안함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리 즐거운 파티든 맛있는 음식이 즐비해있건 그 공간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재미라는 건 '편안한' 상태인 것 같다. 그건 일 뿐만이 아니라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안타깝게도 '편안했던' 가정환경이 아니었다. 10대 때에는 어쩔 수 업이 가정과 학교라는 공간이 전부였기 때문에 집이라는 공간에 내 몸을 이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0대가 되어서는 시간과 공간에 자유가 생기면서 집 안에 내 몸을 놔두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는 회사로 몸을 피할 수 있었지만, 엄마에게는 집이 전부였기에 얼마나 외로웠을지 짐작이 간다. 두 분은 그 시절을 어떻게 보냈을까? 같이 있는 게 정말로 힘들었을까? 아님 누군가가 잡아주고 멈춰주기를 바랐을까?


365일 중 유일하게 쉬는 날이 명절이던 아빠, 자식들이랑 1박 2일로 놀러 가본 적 없이 바쁘게 살았던 아빠, 자신이 돈 버는 기계 같다고 한숨 쉬던 아빠, 시장에서 단 돈 5천 원짜리 티셔츠를 입어도 귀티가 나던 아빠, 노래를 잘 불러서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던 아빠, 콩나물국에 고춧가루 넣어서 얼큰하게 먹는 걸 좋아하던 아빠, 집에 내 친구들이 놀러 오면 나도 같이 놀아도 되냐고 묻는 눈치 없던 아빠, 사실을 자식들 사랑을 받고 싶었지만 받지도 주지도 못하고 끝나버린 가족의 일원 아빠


365일 두 남매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는 게 재미였던 엄마, 자신의 옷 한 벌 사지 못하지만 자식들 4계절 옷은 늘 바꿔주던 엄마, 생선은 대가리가 맛있다고 하던 엄마, 6남매 중 유일하게 딸로 태어났지만 돈이 없어서 대학도 못 간 엄마, 부모에게 사랑을 받아본 기억이 없는 엄마, 자식들 공부할 때 옆에서 책을 읽거나 서예를 쓰던 엄마, 매일 학교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집에 계시던 엄마, 아침을 하루도 빼먹지 않고 챙겨주던 엄마.


그런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딸, 나.

아빠이면서 엄마이기도 한 나.


더 이상 아깝다고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 시절 두 분의 인연이 끝났어도 나는 남아있다. 그러니 토해내고 또 토해내 볼게요.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살아 계셔 줘서 감사합니다.]

[저를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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