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대에서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아빠! 보고 싶다(2)

by 안성미

중학생 시절 어느 날, 학교 수업을 마치고 교문 밖을 나서는데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둘러보니 낯익은 사람이 손짓하며 오라고 한다. 아빠였다.


학교와 집이 멀어서 특별히 데리러 온 줄 알고 반갑게 뛰어갔다. 그날 아빠는 빵집에 나를 데리고 가서 내가 좋아하는 도넛 빵을 사주는데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빵을 다 먹고 우유도 마셨는데 그때까지 아무 말이 없던 아빠가 드디어 말을 했다.


“OO야, 아빠는 도저히 엄마랑 같이 살 수 없어. 헤어지려고 해. 아빠랑 살자.”

“......”

너무 놀랐고 순간 두려운 마음에 갑자기 눈물이 흐르는데 왠지 크게 울면 안 될 것 같았다.


자주 부모가 싸우는 것을 보았고 아니 일방적으로 엄마가 당하는 거였지만 그래도 아빠, 엄마가 헤어진다는 생각은 안 했다. 더군다나 엄마와의 이별은 상상도 못 했다.


“엄마는?”

아빠는 이내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 나를 쳐다보며 하는 말.

“네가 알고 있는 엄마는 친엄마가 아니야. 그러니 아빠랑 살아야 돼.”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라니? 엄마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고 의지하는지 어린 나는 알고 있는데. 하지만 난 아무런 얘기도 할 수 없었다. 그날 아빠 트럭차를 타고 집에 오는 내내 소리 없이 울었던 것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40여 년이 흘렀는데도.


아빠는 집에 나를 내려주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집에 들어오는 데 엄마가 반갑게 맞아줬다. 난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때 당시 우리 가족은 외할머니 집에 살았는데 장독대에서 나를 본 외할머니가 손짓했다. 장독대로 올라가니 할머니가 내 손을 잡고 작은 소리로 얘기한다.


“아빠가 무슨 말 안 해?”

“......”

“OO야, 아빠가 누구랑 살래? 하고 물으면 넌 꼭 엄마랑 살 거라고 얘기해야 한다. 네 아빠가 널 끔찍이 생각하니 엄마랑 산다고 하면 아빠는 엄마랑 헤어지지 않을 거야.”

“......”

“네 엄마가 너를 얼마나 애기 때부터 금지옥엽 키웠는데. 넌 그 은혜 모르면 안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지 딸도 아니면서 딸만 끔찍이 챙긴다. 네 아빠가.”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조금 전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라는 것을 들었는데 아빠도 친아빠가 아니라니. 너무 놀래서 다시 외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그게 무슨 소리야?”



수년 전 OO동에서 아들 낳기만 바라던 집에서 7번째 임신한 여인이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애 없는 어느 부부에게 얘기한다.

“O 씨, 난 이번에도 딸을 낳으면 이 아이는 못 키웁니다. 아이도 저도 죽어요. 혹시 이 아이가 딸이면 O 씨가 키울려?”


몇 달 후 태어난 아이는 여인의 간절한 바람을 저버렸다. 태어난 지 일주일 동안 친모의 모유를 빨고 애 없는 부부에게 안겨진다. 그리곤 그 부부는 동네를 떠난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나.




장독대에서 중학생 여자아이는 할머니가 들려준 옛날이야기를 들었다. 재미없고 슬픈 이야기인데 눈물도 안 나고 담담했다. 결국 무슨 말인가?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아빠, 엄마가 나를 낳아준 친부모가 아니고 아빠가 가끔 농담처럼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거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이 수십 년 전에도 그것은 그리 큰 충격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단지 엄마랑 같이 살 수 없다는 것만 슬펐고 그것을 막아야만 했다. 아빠에게 말하기가 무섭고 두려웠지만 용기 내서 이야기했다.


“엄마랑 살래.”



외할머니의 처방은 옳았다. 부모님은 헤어지지 않았고 아빠는 잊을만하면 옷가지를 집어던졌다. 아빠는 늘 외할머니를 여우라고 하면서 나쁘게 얘기했다.


왜 그렇게 얘기했는지 나이가 드니 저절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난 장독대에서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가슴 저편에 묻어두고 꺼내지 않았다. 아빠가 돌아가실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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