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막 전역했을 때 뜻하지 않은 기회를 얻었다. 호주의 한 세무사 사무실에서 근무를 하게 된 것이다. 초기 인턴으로 시작했던 당시의 기억은 강렬하다. 나 빼고 한국인이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 낯선 곳. 이곳에서 나는 내 호의를 철저하게 무시당했던 뼈저린 기억이 있다.
'한참 눈치 볼 때'라고 하는 막내 인턴의 신분, 게다가 군대에서의 질서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던 당시의 나.
혈기왕성 파이팅이 넘치던 그때의 나는 무엇이든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주어진 일들은 순식간에 끝내 놓았고, 일찍 출근해서 사무실을 청소하거나 커피를 내려놓는 등 아주 부지런을 떨었다. 회사에는 외국인도 나뿐이었지만, 젊은 또래 역시 없었다. 그래서인지 언어의 장벽이 있었음에도 엑셀이나 문서 작성 등의 업무는 확실히 내가 눈에 띄게 빨랐다.
사무실에서는 야근도 존재하지 않았을뿐더러, 그날 주어진 업무 이외에 추가적으로 뭘 더 시키거나 하는 법이 없었다. 보통 내가 맡은 일은 단순한 타이핑 따위였고 늘 오전 중으로 완료가 됐다. 그러다 보니 오후부터는 괜히 뻘쭘하고 눈치가 보였다.
하여 직장동료들에게 도울 게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간 언어 때문에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던 직장동료들에게 예쁨이라도 받고자 했던 것이다.
나름 용기 내어 물어본 도전이었건만….
동료들은 살짝 찡그린 얼굴로 모두 거절하기 바빴다. 당황스러워 벙찐 나는 정말 너무나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여간 눈에 띄었는지 다행스럽게도 동료 한 명이 다가와 '거절의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네가 무슨 뜻으로 우리를 돕겠다고 했는지는 알겠지만, 그건 우리를 무시하는 것과 같아. 여기 사람들이 나이가 많고 네가 어려서 일이 빠르다는 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야. 그렇지만 각자 맡은 일들은 각자 처리해야 하는 거야. 이건 우리가 해야 될 일이고, 퇴근 전까지 우리가 다 할 수 있는 것들이야. 우리가 나이가 많다고 해서 너보다 적게 일해야 한다는 법은 없어, 그리고 네가 어리다고 해서 우리보다 더 많이 일해야 하는 것도 아니야."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군대에서는 그렇게 예쁨 받던 행동이 여기에서 '오만'으로 비쳤던 것이다. 모든 말에 전부 공감이 되었고 이해도 됐다.
나는 이게 꼭 문화 차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과업'에 대한 자세가 놀라웠고, 그 점이 나를 깊이 깨닫게 했을 뿐이다.
전역 직후 넘어온 탓에 유독 고참 시절의 군대가 많이 기억났다. 병장을 달고 난 뒤에는 사실상 이등병과 일병, 상병인 동생들이 가장 많은 임무를 처리해오곤 했다. 어려운 역할일수록 가장 '짬'이 되지 않는 이등병에게 가는 것. 이런 세태가 나에게도 익숙했던 것이다.
그때부터는 동등한 과업을 처리하는 동료들과 같은 위치에서 보다 원활한 소통을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