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먹지 않지만 이 자리엔 끝까지 있고 싶다'면…
'술은 먹지 않지만, 술자리에는 끝까지 있고 싶은 사람'들. 가끔 그들이 크고 작은 분란에 휘말리는 장면을 마주하곤 했다. 특히 방송국에서 근무할 때 유독 이런 사람들의 데이터(?)를 잘 수집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의 술자리는 대낮부터 일상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직속 사수부터 까마득한 대선배님까지, 유독 기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선배님들은 신입인 나에게 '넌 그러지 말라'며 아주 많은 레슨(?)을 해주셨다.
그들은 다양한 장소에서 '애주가'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고 한다. 물론 '애주가들이 싫어하지 않는 술 안 먹는 사람'도 많다. 굳이 마시지 않더라도, 술자리에서 어색함 없이 어울리며 그 자리를 즐기는 그런 사람들.
강요가 수반된 회식 따위의 자리에, 강제로 참석했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참여해 모두를 불편하게 하는 '풀타임 참석자'들의 유형은 보통 다음과 같다고 한다.
첫 번째는, '전달자'다. 술자리가 길어지면 으레 사람은 흐트러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무르익어가는 술자리에서 망가져가는 사람들. 그들의 모습을 맨 정신에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어딘가에 흘려버리는 유형이 바로 '전달자'다. 다른 사람들이 기억을 부분적으로 하거나 아예 못할 때에도, 이들은 알코올이 채 들어가지 않은 두뇌를 십분 활용하여 그간의 모든 일들을 아주 디테일하게 열거한다.
- 어제 이 팀장님이 술 먹다가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 난 술 안 먹잖아, 다 정확히 기억하거든.
- 집에 가는데 김 부장님이 완전 뻗으셨어. 가게에서 오바이트를 하시지 뭐야! 으~
- 2차에서 글쎄 강 대리 아내한테 전화가 왔는데 분위기가 영 좋지 않아 보이더라구, 문제 있어 보이던데.
이들의 말은 '알코올이 가미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꽤 신빙성을 보인다. 그러나, 만취한 사람들은 그들의 말이 사실인 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래서 간혹 부풀리기와 왜곡을 더해 사실과 다른 이상한 이야기들이 생산되기도 한다. 본래 이야기의 전달과정에서는 살이 붙기 마련이다. 심지어 '맨정신'이었다는 무기가 있으니, 애주가들이 이 논리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두 번째는, '탐색꾼'이다. 보통 협력업체들과의 술자리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었던 이 유형의 사람들은 궁금한 게 술자리에서 유난히 많아진다. 평상시에 미처 하지 못했던 질문들을 끊임없이 쏟아내며, 어떤 목적으로든 원하는 답을 이끌어내려고 하는 유형. 주로 정보를 캐내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가끔 어떤 질 나쁜 이는 만취한 자들에게 유도신문 따위를 하기도 한다는 후문이다.
- 혹시 이번 편성(계약)은 좀 내부적으로 결정이 난 건가요?
- 근데 김대리 조 주임 좋아하는 거 아니야? 맞지? 그러지 말고 얘기해봐~!
- 아 근데 솔직히 강 부장 너무 꼴 보기 싫지 않아?
이 경우 역시 위 '전달자'와 접목되면 아주 가관이 아닐 수 없겠다.
세 번째는, '잔소리꾼'이다. 모두 즐거운 분위기에 술을 마시고 있을 무렵, 본인이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자리를 컨트롤하려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물론 대게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모든 일에는 정도가 있는 법. 다른 사람들이 한참 재밌게 놀 때 번뜩 나서서 자리를 마무리 지으려는 사람도 있고, 할당량을 정해놓은 뒤 그 이상의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는 독재자(부장님의 말이다)도 있다고 한다. 다 큰 성인이 되어 스스로 컨트롤하면서 음주를 할 수 있는데, 이리 강압적인 태도로 나오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라고 했다.
- 그 고깃집은 맛이 별로던데요. 다른 데로 가시죠.
- 집에 안 들어가시나요? 이제 얼른 들어가세요(그러면서 택시와 대리까지 본인이 불러버린다).
이 경우 선배들은 고마울 때도 많다고 했다. 다만, 어딘가 모르게 얄밉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뭔가 이해되는 느낌이었다.
마지막 유형은 센터장님이 직접 말씀해주셨다. 이 모든 유형이 뒤엉킨 악성 용종 같은 사람들이 간혹 있다고 하셨는데, 뒷말이 아주 재미있었다. 그들을 보거든 무조건 피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이야 말로 끔찍한 혼종이다. 빵 터져서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난다.
레슨을 수강한 이후 10년은 더 지났다.
그런데도 어째 여전히 비슷한 경우 때문에 간혹 서로 불편한 상황을 만드는 그들을 본다. 요즘의 나는 사실 술을 좋아한다. 잘 마신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여러 술을 가리지 않고 즐기는 편이다. 술자리도 좋아해서 가까운 사람들과 저녁때 한잔 하는 것이 나의 큰 즐거움 중 하나다. 직장 내 회식이나 협력업체 분들과의 술자리도 크게 부담을 느껴본 적이 없다.
여러 술자리에 익숙해지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서 여러 생각을 한다.
좋아하고 / 좋아하지 않고의 자유가 있듯, 자리에 공동으로 참여한 사람들끼리 서로 간 매너를 지키는 것 역시 중요할 것 같다. 어떤 관계든 배려 만큼 윤활유가 되어주는 것도 없다.
불현듯 센터장님이 하셨던 한 마디가 기억난다.
"아니, 탁구를 전혀 못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이 탁구 동호회 무리를 따라가서 탁구장에 간거야. 근데 치지를 않고 구경만 하는거지. 그럼 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얼마나 신경 쓰이겠냐. 탁구를 안 치는 것도 괜찮고 술을 안 마시는 것도 괜찮은데, 괜히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지. 우리만 마시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