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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해지리 May 24. 2023

컨닝에 대한 시시비비




논술 수행평가를 보는 날이었습니다.

주변을 정돈하고 주의사항을 알려주고 평가를 진행했습니다.

오픈북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사전에 논제의 일부를 공개했습니다. 

(이 경우 누군가 대리로 써준걸 아이들이 외워올 우려가 있습니다. 하지만 워낙 논제가 쉬웠고 주장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쓰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점수를 깎아내려는 의도가 아닌 배움에서 생각을 확장시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면 된다는 의도를 충분히 전달해서 앞선 우려를 최소화시켰습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자료를 찾아볼 수 있도록 시간도 넉넉히 준 후 실시한 논술 평가였습니다.  

그래도 점수가 매겨지는 평가이기에 지금까지 배운 학습 내용을 글 속에 녹이도록 쓰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무난하게 평가가 마무리되었다고 여겼는데 점심시간에 아이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작은 포스트잇을 내밀더군요.

어떤 아이가 몰래 이걸 보고 쓰는 걸 봤고, 증거를 위해 그 아이 책상 서랍에서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내용을 보니 글 속에 포함시키라고 학습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컨닝 사건이 발생했네요.  





저는 시시비비 가리는 것에 취약한 교사입니다.


저는 쓴소리하는 것이 힘듭니다. 

아이들의 잘못을 확인하고, 추궁하고, 벌주는 과정이 고통스럽습니다. 

사건 관련자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명명백백 잘잘못을 가리고 처벌을 내리는 건 좀 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해당 아이를 가르치는 교사이고 앞으로도 아이를 계속 대해야 합니다.

그래서 문제 상황과 문제를 일으킨 아이와 마주하는 것이 힘듭니다. 


부정 행위를 한 행동은 분명 잘못된 행동입니다.

잘못을 덮거나 축소시키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당연히 옳지 않은 일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과 동시에 사람이 겹쳐져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가르치는 학생을 직접 처벌해야 하는 것이 저에게는 아픔입니다. 


그리고 이일로 인해 해당 아이가 위축되는 것도 걱정입니다. 

반성해야죠. 

잘못했으니 책임도 져야 합니다. 

자신의 행동을 충분히 뉘우쳐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필요 이상 기를 펴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비난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됩니다. 

 




또 하나 이 일을 처음 전달한 아이들도 걱정입니다.

저는 그 아이들에게 부탁 하나를 했습니다.  

시시비비는 꼭 정확하게 가릴 테니 이 일이 다른 친구들에게 알려지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컨닝이 사실이고, 명백한 잘못이지만 이 일이 소문이 나게 되면 오히려 학교 폭력 가해자로 지목될 수 있다는 것도 알려줬습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에 사전에 이 아이들을 보호하는 마음으로 건넨 조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제 말이 당부가 아닌 협박으로 전달되었을수도 있을 겁니다. 


또한 친구의 잘못을 알리고, 그 친구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곁에서 보는 동안 혹시 죄책감을 느끼는 건 아닐까 싶어 속이 탑니다.

겪지 않아도 되는 심리적 부담을 안게 된 것이 안쓰럽습니다.  

이 아이들에 대한 걱정은 담임 선생님께 협조를 요청드렸습니다. 

상황을 인지하시고 담임선생님께서 제보한 아이들이 마음의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다독여주셨습니다. 

그제사 안심이 되었어요. 

 




이제 제 역할이 남았습니다. 


해당 학생과 면담을 했고 별다른 추궁 없이 바로 자기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아이는 사시나무처럼 떨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정말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를 연거푸 읊조렸습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아이를 더 이상 나무라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아이를 안고 훈계와 조언을 섞어 몇 마디 건넸습니다. 


잘못했어. 그러니 반성해야 해. 깊게 반성하고 같은 일을 반복하면 안 돼. 그러면 정말 큰 죄가 되는 거야. 오늘까지 깊게 반성하고 내일은 털고 와. 그리고 나한테 미안할 일 아니야. 너 자신에게 미안해야지. 그리고 열심히 준비하고 양심껏 평가에 임한 친구들에게 미안한 거야. ★★야. 쌤은 기억력이 나빠. 금방 잊어. 난 신경 쓰지 말고 너 자신에게 미안해 해야 해. 양심을 저버리는 행동은 여기서 끝내야 해. 알았지? 


그리고 절차에 따라 학업성적관리위원회를 열었습니다. 

학업성적관리규정과 사회과 교과협의회의 의견을 종합하여 점수가 부여되었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일이 마무리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의 마음 속의 불은 아직 타고 있을 겁니다.  

이 일이 컨닝을 한 아이에게도, 제보를 한 아이들에게도 생채기를 남기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좀 더 예민하게 아이들을 지켜보는 일일 겁니다. 

앞으로 그리하겠습니다. 

이래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이 어렵습니다 





(사진출처: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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