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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해지리 May 13. 2024

피고름을 얻고 되찾은 아들의 종알거림

실컷 자랑할 시간을 주자

 

큰 아이는 말문이 늦게 틔였습니다.

30개월이 지나도록 두음절 밖에 하지 않았어요.

말귀를 알아듣고 행동했고, 다양한 것에 호기심을 갖는 것으로 봐서는 발달에 큰 문제는 없어 보였는데 유난히 말이 늦으니 애가 타더군요.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서 가까운 상담센터를 예약했고 대기가 길어지면서 기다림의 시간 초조함을 농축시켜 긴장감에 불을 질러버리던군요.

그렇게 안절부절 시간이 갔고 34개월이 되던 그해 11월.

달력이 바뀌던 그날 거짓말처럼 아이는 말문이 틔였습니다.

그동안 누가 말 못 하게 막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여태껏 못한 거 다 쏟아내겠다는 듯 정말 쉼 없이 종알거리더군요.

아이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들어주는 것이 행복이던 시절입니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아이의 말에 시큰둥해졌습니다.

재잘거리는 게 좋기만 하더니 이제는 좀 수다스럽다 느끼기도 합니다.

게다가 아이가 아는 것에 대해 자랑하듯 말하면 칭찬보다는 확인 사살을 합니다.

아이는 칭찬받고 싶어서 배운 것을 늘어놓는 것인데, 부모는 아이가 제대로 배우고 있는 것인가 테스트가 해보고 싶습니다.

슬픈 동상이몽.

칭찬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제대로 아는 거 맞아?' 핀잔이 놓입니다.  

잘한다고 추켜세우기보다는 내가 좀 더 알고 있는 알량한 지식으로 찍어 누르는 때도 있습니다.

자랑하려는 아이 마음도 몰라주고 '나도 그 정도는 알아. 게다가 난 이런 것도 알아.' 하면서 아이보다 많은 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이가 자랄수록 실컷 자랑할 시간을 주려 합니다.

"엄마 그거 알아? 저거 소나무 꽃이다. 꽃은 암술, 수술, 꽃잎, 꽃받침으로 이뤄지는데 모든 꽃이 다 갖추고 있는 건 아니래. 소나무 저 부분에서 송진가루가 나온대. 신기하지?"

아이가 가리킨 나무가 정말 소나무가 맞는지, 제대로 알고 말하는 건지 검증은 필요 없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 엄마에게 칭찬받고 싶은 마음에만 집중합니다.


"엄마는 소나무는 꽃이 없는 줄 알았어. 꽃이 꼭 꽃잎을 갖고 있는 건 아니구나. 신기해라. 고마워. 또 새로운 거 배우면 알려줘. 엄마도 아들 덕분에 똑띠 되겠다'


아이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소나무인지 전나무인지 잣나무인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모르겠고요 ㅋ



"엄마엄마, 어제 내가 어렵게 푼 문제 있잖아. 그걸 30분이나 붙잡고 있었더니 오늘 학교에서도 문제가 생각나더라. 그래서 문제를 기억해 내서 친구들에게 풀어보라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당연히 못 풀었지. 짧은 쉬는 시간이라서 다들 정신이 없었을 거야. 그래도 자랑하고 싶었어. 내가 풀었다고. 지금 내가 그려놓은 문제 찍어서 보내줄게 엄마도 봐봐. 글씨도 신경 써서 또박또박 쓰고, 문제는 자로 반듯하게 그린 거야. (사진을 전송한 후에) 봤어? 완전 잘 그렸지. 자 대고 똑바로 그릴려고 엄청 신경 썼어...."


사실 이렇게 시작한 아들과의 통화는 26분 35초 동안 이어졌습니다.


엄마에게 칭찬받고 싶어서 가던 길 멈추고 보내준 사진




아들의 자랑을 받아주기 시작하면서 대화가 많아졌습니다.

잘난 척을 허용(?)하고 늘어놓게 두었더니 제 귀에서는 피가 좀 납니다.  

피고름을 얻고 아들의 종알거림을 되찾았으니 제법 이문이 남는 장사인 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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