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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해지리 Aug 26. 2024

호르몬 널뛰기에 당하지 않겠어


지난해 여름부터 인지, 아니면 가을부터인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 언저리부터 아들 얼굴에 표정이 희미해지더니 한여름 살갗이라도 닿은 듯 예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면 입은 댓발 나와 삐죽거리기 일쑤.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조건반사 '싫어'를 시전 하는 통에 대화는 매번 감정싸움으로 마무리되곤 했습니다.

조금 컸다고 까부는 아들이 얄밉고 괜히 자식에게 지기 싫다는 똥고집으로 맞대응하던 시간이었네요.



지난봄.

늘 키가 작아서 걱정인 딸아이의 성장클리닉 정기 검진이 있던 날.

아들도 큰 편이 아닌지라 한번 점검을 하자 싶어서 남매를 대동해서 병원엘 갔습니다.

기본적인 문진 검사를 마치고 의사 선생님 뵈었는데 정작 딸아이는 뒷전이시고 무심결에 함께 간 큰 아이를 보며 불안한 말들을 쏟아내시더군요.


'얘는 다 컸네, 아구 사춘기가 한참을 지났네, 아구 고환도 거의 마지막 단계야(크기를 측정하는 구슬 뭉텅이로 체크하시더군요, 여기서 크게 당황), 앞으로 많이 못 크겠는데'


생각지 못한 상황 전개에 눈만 커진 채로 제대로 된 진단을 통보받을 때까지 어찌나 심장이 뛰던지요.  

정리해 보면 정확한 호르몬 검사를 해봐야 하지만 지금 판단으로 이미 사춘기가 중반을 훌쩍 넘어섰다는 겁니다.

이대로 두면 예상키도 161cm 밖에 안될 거 같으니 당장 성장주사 치료를 시작하자는 말씀이었습니다.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성호르몬이 많이 나오면 안 되니 성호르몬 억제주사를 병행하자는 처방이 내려졌습니다.

원래 걱정이 되었던 둘째는 체중 관리만 하고 더 지켜보자는 말씀과 함께.



그렇게 한 달에 한 번씩 성호르몬 억제주사와 주 6회 성장주사 치료가 시작되었습니다.

(성장 주사 이야기는 천천히 글로 옮겨보려 합니다.)

이미 큰 키를 욕심껏 더 키우려는 것이 아니라 남자아이 예상키 161cm라는 저신상을 벗어나려는 것이니 제법 눈물 겹습니다.

체중 관리도 병행되어야 해서 식단도 바꾸고, 운동을 늘리고, 잠도 일찍 재우고 신경 쓸 것이 한둘이 아니네요.

비용도 만만치 않으나, 어쩌겠어요.

남보다 사교육비 아껴서 집공부하는 중이었는데 그 돈이 모두 주사비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아직 시작한 지 4개월 정도 되었고, 성호르몬 억제주사를 병행하는 동안은 성장이 더딜거라는 말씀이 있으셨으니 효과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반응이 있습니다.

아이가 예전처럼 유순해졌습니다.

시베리아 기단에서 발원하는 한겨울 계절풍처럼 냉기 가득했던 녀석이 봄바람처럼 따스워졌습니다.

손잡고 걸을라 치면 서릿발처럼 차갑게 뿌리치더니 요사이는 거부하지 않고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경쾌하게 걸어줍니다.

볼에 뽀뽀하며 무심하게 씻어내기는 하지만 밀어내지 않으니 아이가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듭니다.



그래서 알았습니다.

앞서 다소 반항적인, 냉랭했던, 섭섭하게 만들던 건 왕성한 호르몬 분비로 인한 변화하고 있었나 봅니다.

이제는 어른이 되기 위해 성호르몬이 분비되고 뇌 구석구석이 리모델링되고 있는 중이었던 겁니다.

아이의 변화를 성장으로 여겼어야 했는데 반항으로 받아들인 제가 참 부끄럽습니다.   

아이 자신도 호르몬 때문에 뜻하지 않게 급발진해놓고 스스로도 당황했을 것을 생각하니 안타깝고요.

억제주사는 이제 끝나갑니다.

큰돈을 쓰고 있긴 하지만 생각지 못한 시간을 다시 돌아 받게 되었습니다.  

다시 기회가 왔습니다.

전처럼 시간이 지나면 성장에 맞춰 호르몬이 분비되고 사춘기를 통과해서 어른이 될 겁니다.

이제는 아이가 돌변하는 태도에 매몰되지 않고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여기며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음을 고쳐 먹으니 모든 게 달라 보입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이렇게 세상일 달리보입니다. 




사진출처: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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