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에게는 부모보다 더 잘 놀아주고, 친구보다 편한 이모가 있습니다.
조카가 태어나면서부터 육아의 1할을 맡아주었을 만큼 제게도 든든한 지원군입니다.
아이들을 좋아해서 눈높이에서 잘 놀아주기도 하지만 직업이 임상심리전문가이다 보니 그들의 마음을 잘 헤아립니다.
부모도 미처 살피지 못하는 부분까지 세심하게 관찰해서 조언해 주는 덕분에 동생이지만 오히려 크게 의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가끔은 입바른 소리에 제 뜻을 차단당할 때도 있습니다.
엄마, 없어
딸아이는 1년여 전부터 위쪽 치아에 교정기를 합니다.
탈부착이 가능한 것으로 식사 때만 빼두고 잘 때까지 종일 착용해고 있습니다.
송곳니가 나올 곳이 없어서 시작부터 덧니로 나온 것을 자리 잡게 해 주기 위해 시작했는데 1년이 넘어가니 모든 이가 가지런해져서 아주 고른 치열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학년 아이들은 교정기를 하면 급식먹고 두고와서 분실이 잦다고 합니다.
교정기 케이스를 챙겨가지 않아서 (그나마 케이스에 넣어두면 눈에 띄어 찾기 수월하지만) 식판에 빼놓고 식사하다가 그대로 잔반으로 보내버리는 식 입니다.
빨리 인지해서 찾으면 다행인데 보통 아이들은 놀 생각에 잊고 있다가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됩니다.
하지만 늦었어요.
100만원 빠이빠이
또르르
다행히 딸아이 학교는 급식실이 없습니다.
교실 급식이라 아이가 학교에서 분실할 위험은 적겠구나 했습니다.
역시나 고맙게도 지난 1년간 아이가 야무지게 챙긴 덕에 탈없이 지냈습니다.
그러는 중이었습니다.
'엄마, 나 교정기를 할머니네 두고 왔나 봐. '
학교 끝나고 태권도 학원을 갔다가 엄마가 퇴근하기 전까지 외할머니 댁에 머물다 옵니다.
거기서 간식을 먹으려고 교정기를 빼놓았고 그대로 외갓집에 두고 왔다는 겁니다.
다행히 다음날 주말을 핑계로 짐 챙겨서 다시 할머니네로 놀러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니 걱정 없이 저녁 시간을 보내고 친정으로 이동했습니다.
그 사이 저는 교정기를 잊고 있었는데 1년 동안 착용하고 있던 딸아이는 허전했던 모양입니다.
도착하자마자 뒤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 여기 교정기 없었어요? 이모, 혹시 내 교정기 봤어? '
종종 교정기를 어디 뒀나 부스럭거리는 날들이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을 수 있었으나 뭔가 느낌이 달랐습니다.
애미의 촉은 왜 이럴 때 엇나가지 않는 걸까요?
온집 구석구석, 쓰레기통과 음식물쓰레기까지 모두 다 훑어도 교정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소파를 들어보고 테이블 아래를 모두 랜턴 켜서 확인해도 나오지 않더군요.
집에 남아있는 남편에게 전화해서 집과 아이 가방을 모두 수색했으니 헛수고였습니다.
또르르
100만 원입니다.
순간 제 눈빛이 휘가닥 돌아가는 걸 눈치채고 아이가 좌불안석입니다.
이런 순간 매번 이모가 등판합니다.
어차피 잃어버린 거야.
어쩔 수 없는데 애 잡을 필요 없잖아.
누구나 실수는 하지.
○○아, 엄마한테 잘못했다고 말씀드려.
그리고 언니도 여기서 끝내
지금부터 말해봤자 잔소리가 될 뿐입니다.
알지요.
화를 내고 아이를 다그친다고 해서 사라진 교정기가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정말 이렇게 쿨하게 끝내야만 하는 건가요.
자그마치 100만원짜리를 분실했단 말입니다.
하지만 동생의 말에 반박할 말이 궁색합니다.
아이는 이모 뒤에 숨어서 쭈뼛거리더니 이내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여기서 버럭거려봤자 엄마만 나쁘고 못나질 뿐입니다.
이모는 이론대로 대응할 수 있지만 엄마는 부글부글 감정이 앞서는 것이 억울할 뿐입니다.
구차하게 반박할 말들을 찾아봤지만 역부족이네요.
그러는 사이 감정은 가라앉았습니다.
이모 말에 틀린 게 하나 없네요.
화를 낸다고 이 상황에 나아질 것이 없습니다.
차분해진 채로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100만원은 큰돈이야.
빼면 꼭 케이스에 넣어서 보관하라고 했는데 다른 곳에 두니 사라졌지.
자기 물건은 스스로 챙기고 관리해야 하는 건데 이건 딸 실수야.
이건 인정하자!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사실만 봤습니다.
화냈다면 아이에게는 무서웠던 감정만 남았을 겁니다.
감정을 걷어내고 이야기한 덕분에 메시지가 잘 전달되었습니다.
제법 쿨한 엄마 흉내를 낸 거 같습니다.
이렇게 100만원을 날렸습니다.
그날 자려고 누워서 끝내 한마디 하긴 했습니다.
"당분간 우리 집에 고기반찬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