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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미숙 Jul 05. 2023

내 친구는 진상 고객

콜센터 11년 차 직장생활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일부 내용은 각색하였습니다.





''반갑습니다. 고객님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날은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했다. 우리 회사 콜센터는 24시간 운영이라 정상 업무가 시작되기 1시간 전에 미리 출근해서 전화를 받았다. 야간 근무자가 있지만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고객님들은 업무 시작 전인 8시에도 콜센터로 전화하는 경우가 있다.







''죄송하지만, 고객님께서 요청하신 업무는 정상 영업이 시작되는 9시 이후부터 처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찍 전화를 받는다고 해도 처리할 수 있는 업무가 많지 않다. 정말 기본적인 업무만 가능해서 양해를 구하고 끊어야 하는 전화가 대부분이었다. 죄송한 마음을 듬뿍 담아 사정을 이야기하면 신사답게 전화를 끊는 분들도 계시지만 밑도 끝도 없이 무조건 처리하라고 우기는 고객들도 많다.







맨 정신에 우기면 죄송한 마음 가득 담은 진중한 목소리라도 연출할 수 있는데 분명 전날 저녁부터 아침까지 열심히 달린 것 같은 만취자가 전화하면 답이 없다. 말도 안 통해, 내 나팔관 닳아 없어질 정도로 소리 지르면 출근한 지 한 시간도 안 지났는데 집에 가고 싶어 진다.

그날도 연속되는 진상 퍼레이드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불만 전화가 계속 이어질 거 같은 기분 나쁜 예감은 언제나 나를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







''야! 너 내가 우습게 보여?''


아 잘못 걸렸다. 고객님 제가 고객님을 언제 봤다고 우습게 봅니까.
내가 첫인사를 하자마자 고객은 소리부터 지르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에 터진 고객님의 목청은 명가수가 울고 갈 정도다. 나는 졸려서 아직도 목이 잠겨 있는데.
그런데 듣다 보니 목소리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다. 나는 매일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다 보니 사람을 목소리로 기억할 때가 많다.

혹시 이 목소리는...?
설마 너니...?







몇 주 전 중학교 졸업하고 연락도 안 하던 친구에게서 뜬금없이 연락이 왔다. 내가 알던 그녀는 그때까지 모태솔로였기 때문에 그녀의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은 놀라웠다. 더 놀라웠던 점은 그 남자친구가 중학생 때 같은 반이었던 철수라는 것이다. 학교 다닐 때 철수가 친구를 많이 괴롭혔었는데 그때부터 관심이 있었는지 성인이 되고 나서야 사귀게 되었다고 한다. 서로 욕했던 친구가 연인 사이가 되고 신기하다고 다음에 연락하자고 예쁜 사랑 하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 지금 내 귀가 녹아내릴 정도로 소리 지르는 이 고객은 철수였다. 그의 정체를 알고 나자, 참을 수 없는 화가 밀려왔다. 중학생 때 여자애들을 괴롭히던 철수의 못 된 모습이 떠올랐다.
이때부터 나의 기억 속 철수의 모습은 자신은 엄청 경우 있는 사람이지만 우리 회사 때문에 피해가 막심하다고 우기는 진상 고객 이미지로 박혀버렸다.








어떤 정신으로 전화를 끊었는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전화는 겨우 끊었고 일단 화장실로 갔다. 휴대폰 메시지창을 열고 철수를 선택해서 수많은 욕들을 적어 내려갔다. 나의 분노와 내 엄지는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끝내 전송하기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콜센터 업무를 하다 보면 수많은 진상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을 다 기억하고 있다가는 머리가 터져버릴 것이다. 나는 또 다른 진상들을 만나면서 철수를 잊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 후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불렀고 나는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철수였다.
아 오랜만이라고 어떻게 지내냐고 나는 지금 이런 일을 한다고
하면서 내민 명함에는 대기업 로고가 아주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나에게는 콜센터를 다니면서 늘어난 스킬이 하나 있다. 기분이 좋지 않아도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이다. 머릿속에서는 진상 고객 철수의 목소리가 계속 떠올랐지만, 나는 철수의 이야기가 재미있는 척 나눴다.








''어어 그래 연락하고 다음에 술 한잔 하자''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고 뒤돌자마자 표정이 굳어졌다.
집에 올라가 씻고 책상 앞에 앉으니 철수에게서 잘 갔냐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와의 대화방에 들어가 보니 내가 예전에 써놓고 전송을 누르지 않았던 욕들을 보게 되었다. 일단 욕을 지우고 나는 잔다고 잘 자라고 다음에 연락하자고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게 끊어버렸다.







안타깝게도 철수는 자신이 소리 지르며 억지 부렸던 전화를 받은 상담사가 나라는 것을 모를 것이다. 나는 평소 목소리와 업무용 목소리가 정말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얘기하지 않는 이상 철수는 영원히 모를 것이다. 자신의 숨겨진 모습을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콜센터에 전화해서 연결되는 상담사들이 나의 친구일 수도 있다. 엄마 아빠일 수도 있고 애인일 수도 있다. 내 동생일 수도 있고 나의 형제일 수도 있다. 전화기 너머에 그 누가 내 전화를 받을지 아무도 모른다.
나는 콜센터에 전화할 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철수처럼 행동하지 않기로 노력해야겠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만날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철수와 술 한잔을 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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