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세종 Oct 13. 2021

꿰이지 않은 구슬





 여름이라는 섬(Leave Me in Summer)



 8. 꿰이지 않은 구슬



 안대와 콧등 사이로 파고드는 따가운 햇살이 눈꺼풀 틈새를 찔러대고 있었다. 간신히 돌아누워 빛을 피했지만 이미 방안을 점령한 환한 볕은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만 알려줄 뿐이었다. 억지로 눈을 뜨자 아무런 장식이나 꾸밈도 찾을 수 없는 밋밋한 방 풍경이 펼쳐졌다. 화면을 두드리니 휴대폰은 오전 열한 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몸은 정시에 맞춰 깨어났다. 재수 없게도 여덟 시 정각이라면 회사에 늦을 것이고 일곱 시 정각이라면 바른 시간이며 아홉 시 이후라면 오전 반차를 써야 한다. 어느덧 회사를 그만둔 지 삼 주가 지난 때였다.

 한참이 지났지만 나도 모르게 시간을 확인하고 움찔거리기 일쑤였다. 한번은 정신없이 머리를 감고 와이셔츠 단추를 잠근 뒤 넥타이를 두르다 겨우 퇴사했다는 사실이 생각나 주섬주섬 옷을 벗기도 했다.

 하고 싶은 일은 보이지 않았고 나는 최대한 생활비를 아껴가며 버틸 수 있는 시간을 늘리고 있었다.

 벌써 오 년도 더 된 일이었지만 그해의 제주도 여행은 여전히 선명하게 떠올랐다. 두 사람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의 풍경과 멀리 보이던 외로운 한라산, 음울한 개구리의 울음과 붉은 피. 개구리의 피 색깔까지 떠올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려지는 어둠 속 노루의 검은 눈동자. 시간 순서로 본다면 노루가 먼저 떠올라야 하지만 내 머리는 애써 노루의 존재를 잊기라도 한 듯 항상 개구리들의 흔적을 떠올린 다음에야 노루의 눈동자를 기억해냈다. 어둠에 동화된 그 눈동자를 나는 분간도 하지 못했으니 아마 난 그게 존재할 수밖에 없고 존재했으리라는 추측만으로 그걸 본 것이리라.

 손끝이 저렸다. 오한을 느끼고 다시 이불속으로 몸을 숨겼다. 아직 여름이었지만 공기는 차가웠다. 빼꼼히 손을 내밀어 리모컨을 쥐고 에어컨을 껐다.

 “어우, 추워.”

 할 일이 없었다. 이렇게 한량처럼 누워 지나간 일만 회상해도 괜찮을까.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보람 있는 일, 가치 있는 일, 돈이 되는 일, 적어도 삶의 중요한 과제가 너무 낮은 온도로 설정한 에어컨을 끄는 것보다는 나은 일. 그런 일이 보이지 않았다.

 “아.”

 짧게 아 소리를 내보았다.

 “아!”

 세게 아 소리를 내보았다.

 “아아.”

 두 번 아 소리를 내보았다.

 “아아아아아.”

 굴곡지게 아 소리를 내보았다.

 “아악.”

 아악 소리를 내보았다.

 멍청했다.

 서혜의 번호는 한참 전에 지웠다. 서울로 돌아오기 전인 것 같은데, 성현이의 번호를 내가 지웠나.

 주소록에 그녀의 이름을 써보았지만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이상했다. 서혜의 번호를 지운 기억은 나는데 성현이의 번호를 지운 적은 없었다. 그녀의 번호를 받았는지도 가물가물했다. 서혜의 번호를 지운 건 서귀포에 있던 내 숙소에서였다. 그걸 왜 지웠지.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뒤로 서로에게 연락한 적이 없었다. 제주도에서 만난 사흘이 전부였다. 남은 이틀이 끝이었다.

 처음과 끝이 꿰이지 않은 구슬처럼 두 사람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은 앞뒤가 뒤섞인 채 이리저리 머릿속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안간힘을 쓰며 모두를 한 번에 엮어보려 했지만 이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하나씩 잇는 수밖에 없었다. 맞다. 서혜의 번호를 지운 이유가 드디어 생각났다.

 곁에 누운 성현이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걔 번호 지워.”

 그때 우리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








 다음에서 계속

이전 07화 세 살 연상의 남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