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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종 Oct 08. 2021





 여름이라는 섬(Leave Me in Summer)



 6. 껌



 편의점에서 펜션까지 달려오는 데는 채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현관 앞에 다다라서야 뜀박질을 멈추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달렸는지 신발에 박힌 꺼칠한 무언가는 이미 한참 전에 떨어져 나간 뒤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하루였다. 너무 많은 일을 겪었고 너무 많은 감각이 떠올랐다. 차로 노루를 박은 게 마치 어제 일처럼 느껴졌다. 네모난 구멍이 뚫린 자동차 범퍼가 적어도 노루와 부딪친 건 사실임을 알려주었다. 어디서부터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감각인지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문을 두드렸지만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나올 때 마루에서 휴대폰을 보던 서혜의 모습이 떠올랐다. 초인종을 눌렀지만 역시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서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성현이의 번호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만 지쳐버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차가운 건물 벽에 등을 기대자 이내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꼴인지 한심해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그냥 렌터카 업체가 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놔둘 걸 그랬다. 괜히 외모에 이끌려 별것도 아닌 일에 호승심을 부렸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난 게 아닌가. 서혜가 한번 튕길 때 바로 튕겨 나갔어야 했다. 서귀포 방향으로 바로 내려왔다면 숲길을 지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오른쪽 허벅지와 사타구니를 찌르는 날카로운 상자의 모서리가 느껴졌다. 이 쓸모없는 콘돔 상자를 당장 옆으로 보이는 논밭에다 던져 버리고 싶었다.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돈을 들여가며 구태여 이런 걸 사 왔다는 말인가.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낮은 베개와 무거운 몸을 누일 침대뿐이었다.

 “윤진이 오빠가 왜 이리 늦지?”

 “잘 모르겠는데.”

 닫힌 현관문 너머로 작은 말소리가 들렸다. 발로 문을 찰까 하다가 그래도 문명인이라는 생각에 왼손을 들어 현관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타박거리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빼꼼히 열린 문틈으로 똥머리를 동여맨 서혜의 얼굴이 나타났다.

 “여기서 뭐해요.”

 “문을 안 열어줬잖아.”

 “진짜? 나는 씻고 있었는데.”

 그녀가 팔 하나로 지탱해주는 문을 밀고 펜션 안으로 들어갔다. 나올 때만 해도 서혜가 앉아 있던 소파에는 어느새 민트색 파자마 차림의 성현이가 편안한 자세로 누워 여유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서혜는 방금 화장실에서 나온 듯한 보라색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지 그랬어요.”

 “눌렀는데.”

 “성현아, 초인종 소리 못 들었어?”

 “못 들었어.”

 성현이의 얼굴에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보는 앞에서 현관으로 돌아가 초인종을 눌러보는 건 치졸한 짓 같았다. 일단 씻고 오겠다며 계단을 오르려는 찰나 성현이가 입을 열었다.

 “주머니에 그건 뭐예요.”

 정신이 번뜩 들었다.

 “껌, 이따 씹으려고.”

 “차에 껌도 없던데.”

 “빌린 거잖아. 원래 내 차에는 항상 껌 통이 있거든.”

 완전히 말려든 것 같았다.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거짓말까지 해버렸다.

 “이따가 저도 하나 주세요.”

 성현이가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파 위에 엎어둔 휴대폰을 집어 들더니 화면 위로 손가락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서혜는 생각지도 못한 냉랭한 분위기에 당황한 듯했다.

 “씻고 오세요. 바로 잘 거 아니죠?”

 이 층에 있는 화장실에서 몸을 씻으며 고민에 빠졌다.

 유리창을 열고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편의점으로 달려간 다음 껌 한 통을 사 와 다시 문을 열어달라고 한다.

 가장 멍청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실은 콘돔이라고 두 사람에게 고백한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차를 몰고 서귀포로 도망치는 게 나을 듯했다.

 ‘미안해 얘들아,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겠어. 모레 보자!’

 이것도 아니었다.

 물은 따뜻했다. 둘이서 쓴 온수기의 물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어쩌면 내가 두 사람이 모두 씻고 난 뒤에야 돌아와 편하게 물을 쓰는 걸지도 몰랐다.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제야 서혜가 씻고 나왔다는 것은 성현이가 늦게 나온 탓에 서혜가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했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별 쓸모없는 생각들만 머릿속에 맴돌아 나를 골치 아프게 했다. 지금 내게는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너무 피곤해서 안 되겠어, 나 먼저 잘게.’

 일 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밑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얼른 작별 인사를 건네는 내 모습을 그려보았다. 화장실을 메운 뿌연 증기가 유리에 비친 얼굴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주위를 가려주었다. 나는 수증기에 갇힌 채 그네들에게 말할 대사를 연습했다.

 “너무 피곤해서 안 되겠어 얘들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흥분된 말투로 하면 안 된다. 좀 더 힘없는 듯이 해야 한다.

 “얘들아, 오늘 너무 많은 일을 겪었지.”

 말이 길어지면 아까처럼 실언을 할 게 분명했다. 이삼 초 안에 끝맺을 수 있는 문장이 필요했다.

 “씻으니까 긴장이 풀리고 잠이 쏟아지네. 나 먼저 잘게.”

 나쁘지는 않지만 구태여 피곤하다는 사실에 이유까지 달며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더 간결한 답안이 있을 것이다.

 “도저히 안 되겠어, 나 먼저 잘게 얘들아.”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연습할 차례였다.

 “안 되겠어 얘들아, 나 먼저 잘게.”

 “나 먼저 잘게 얘들아, 도저히 안 되겠어.”

 “도저히 안 되겠어 얘들아, 나 먼저 잘게.”

 “얘들아, 도저히 안 되겠어. 나 먼저 잘게.”

 대사는 점점 능숙하고 자연스러워졌다. 누구든 이 말을 들으면 그를 향한 연민과 안타까움에 ‘피곤했죠, 얼른 들어가 쉬어요’라고 말해줄 게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보기로 했다.

 “얘들아, 도저히 안 되겠어. 나 먼저 쉴.”

 그 순간 화장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해요 오빠.”

 또 성현이였다.

 “씻고 있었지. 무슨 일 있어?”

 “샤워를 사십 분씩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씻다가 쓰러졌나 해서 올라와 봤지. 그런데 안에서 무슨 말을 그렇게 중얼거리는 거예요.”

 “전화했어 잠깐.”

 “휴대폰은 침대 옆에 있는데?”

 도대체 얘가 나한테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걸까. 아무튼 방에서 빨리 내보내야 했다.

 “먼저 자려고 올라왔어요. 서혜는 벌써 방으로 들어갔고요. 오늘 고생 많았어요. 푹 쉬어요.”

 “그래, 너도 잘 자.”

 다행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둘도 피곤할 것이다. 샤워를 하며 연습한 대사가 무용지물이 된 것보다는 이 밤을 무사히 보낼 수 있게 된 데에 감사했다.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지만 불이 켜진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몸에 묻은 물기를 닦고 수건을 화장실 문고리에 걸었다. 혹시 몰라 방문을 잠근 뒤 알몸으로 침대 위에 누웠다. 푹신한 이불의 하얀 천이 등허리와 엉덩이 아래 남은 물기마저 세심하게 빨아 당겼다. 휴대폰으로 손을 뻗자 빳빳한 비닐로 포장된 조그만 상자 하나가 손에 쥐였다.

 ‘바른 생각 AIR FIT.’

 물끄러미 상자 표지에 적힌 글씨를 읽다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휴대폰을 탁자 위에 올리고 바지를 벗다가 상자 모서리에 또 허벅지살이 찍혔다. 반쯤 내린 바지를 추켜올려 주머니에 든 그것을 꺼내 휴대폰 옆에 내려놓았다. 다시 바지를 벗을 때는 몸 어디에도 걸림이 없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상의까지 벗어서 옷장에 걸어놓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여기까지는 완벽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애당초 편의점에 갔을 때부터 사지 말았어야 했다. 차라리 사자마자 포장이라도 벗겨놓을 것을 그랬다. 그랬다면 예전에 썼다가 우연히 바지 안에 있었다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다.

 빳빳한 비닐로 포장된 콘돔 상자의 표면이 형광등 불빛에 비쳐 새하얗게 빛났다. 누가 봐도 오늘 쓰려고 사 온 것처럼 보였다.

 혹시라도 성현이가 이 이야기를 서혜에게 하면 어쩌지. 이 생각은 아까 서혜가 들은 ‘둘이 눕기에는 작네’와 어우러져 감당하지 못할 결과를 상상하게 해주었다.

 휴대폰만 본 게 아닐까.

 지금이라도 몰래 짐을 챙겨 서귀포로 도망쳐야 하나.

 방문을 잠갔어야 했다. 아니, 편의점에서 콘돔을 사 오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두 사람을 차에 태우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도중에 돌아오지 말고 그냥 서귀포로 내려갔어야 했다. 아니, 아예 혼자서 제주도에 내려오지를 말았어야 했다.

 어느 순간 나는 잠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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