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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종 Oct 04. 2021

노란빛





 여름이라는 섬(Leave Me in Summer)



 4. 노란빛



 두 사람의 숙소에 도착해보니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현관까지 길게 조명이 늘어서 있었다. 고개를 숙인 꽃봉오리 모양으로 만든 조명 속 전구가 길가에 지그재그로 세워져 검은 도로를 비추었다. 펜션 주변에 있는 논밭에서 기어 나온 개구리들은 낯선 이를 경계라도 하듯 음울한 울음소리를 내며 우리의 주위를 에워쌌다.

 “운전도 오래 했는데 들어와 잠깐 쉬다 갈래요?”

 펜션 앞에 차를 세우자 조용히 있던 서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뜻밖에도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평소 같으면 당연히 그러리라 대답했을 텐데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옆에 있는 성현이를 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핸드백을 든 채 내릴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내일은 오후까지 일정이 있다고 했지? 모레 천지연 폭포를 보러 올 때 같이 놀자. 쇠소깍이라고 괜찮은 곳이 있거든.”

 “오빠는 거기까지 올 수 있어요? 맨 아래쪽이던데.”

 “나는 숙소가 그쪽에 있어.”

 “정말요? 여기까지 와도 괜찮아요? 너무 멀리 왔는데.”

 이쯤에서 밝히는 게 예의였다. 너무 편한 마음으로 보내주면 안 될 일이었다.

 성현이는 벌써 내게 관심이 사라진 듯했다. 뒤에 앉은 서혜가 어깨 위로 휴대폰을 건넸다.

 “번호를 알려주면 내일 연락할게요.”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끼며 서혜의 휴대폰에 내 번호를 눌렀다.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서 작은 진동이 울렸다.

 “내 이름 기억하죠?”

 “신서혜 맞지? 나는 김윤진이야.”

 “알고 있어요.”

 휴대폰을 건네받자마자 그녀는 바로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려버렸다. 우리가 번호를 주고받을 동안 가만히 앉아 숙소를 보던 성현이도 그녀를 따라 내렸다.

 향기에 색깔이 있다면 방금 맡은 이 향기는 남빛이리라. 줄기의 끝이 양쪽으로 갈라져 비스듬히 기울인 종 모양으로 핀 보라색 꽃봉오리. 길게 뻗은 수술 끝 노란 솜털과 그 솜털을 알아보게 한 남빛 향기. 이것은 누구의 것일까.

 성현이는 나를 보지 않고 숙소를 향해 걸었다. 서혜가 내 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나도 창문을 열어 화답했다. 잠시 차 안에 남은 향을 음미하다 후진 기어를 넣었다.

 빠져나오는 길은 들어올 때보다 한결 차분했다. 나도 모르게 긴장한 탓인지 순간 눈앞이 캄캄해져 브레이크를 세게 밟았다. 닫힌 창문을 뚫고 오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피곤에 지친 신경을 건드렸다. 가장 시끄러운 쪽으로 액셀을 밟아 그 소리를 짓뭉개려 했지만 녀석들은 논과 밭에서 끊임없이 기어 나오는 듯했다.

 이곳에 더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차를 몰아 가로등이 있는 도로변까지 나와 비상등을 켰다. 차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 길은 적막하기만 했다.

 옷깃을 잡아끌던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그녀가 나를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한참을 더 그곳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어둠 속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을 노루의 검은 눈이 그려졌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쥔 채 한동안 아무 의미 없이 브레이크 페달을 부술 듯이 밟았다. 내 지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 복잡한 기계는 나를 조롱이라도 하듯 부드럽게 종아리와 허벅지의 힘을 보이지 않는 어딘가로 흘려보냈다. 발을 떼자마자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페달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분한 마음이 들어 다시 그것을 밟아보려다 그만두었다.

 환하게 불이 켜진 편의점이 보였다. 잠깐 저곳에 들러 라면이라도 한 그릇 먹고 갈까 하다가 참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숙소로 돌아가는 게 좋을 듯했다. 모레 두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더 나아질 것이다.

 다시 아까의 기억이 떠올랐다. 빨간 SUV 옆에서 골치 아파하던 두 사람. 원피스 차림의 그녀. 아니, 그녀는 다른 여자이지 않았나. 당연하다는 듯이 옆자리에 앉은 성현 씨. 마음에 든 사람은 서혜였다. 성현이라는 여자애는 역시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나를 궁지에 몰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서혜는 얼굴이 예뻤다. 예전부터 나는 선이 뚜렷한 외모를 좋아했다. 조금은 각져 보이기도 하는 그녀의 광대와 턱이 자꾸만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에 비하면 성현이는 둥그스름한 찐빵형 얼굴이었다.

 계속 챙겨줘야 할 것 같은 사람. 피곤한 타입은 딱 질색이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컵 홀더에 넣었다. 무슨 노래를 들으며 돌아갈지가 고민되었다. 산뜻한 걸 들을 기분은 아니었다. 조금은 착잡하면서도 약간은 아쉽고 무서운 느낌. 왜 무서웠을까. 노루 때문일까. 노루와 부딪친 건 놀랄 일이지 무서운 일은 아니었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나는 무서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밤거리의 가로수들은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낮에는 샅샅이 보이던 그 얼굴들이 밤만 되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대신 하늘을 차지한 건 어둠이었다. 푸른 잎사귀마다 물든 어둠은 짙은 숲에 가면 밤처럼 느껴진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바로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구름에 가린 건지 산 너머에 있는 건지 달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숲 속을 달리고 있었다.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고 있을 두 눈의 불빛. 정작 차에 받히고 나니 녀석의 눈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코앞까지 닥치고 나서야 비로소 그와 내가 서로의 존재를 알아차리며 나타난 노란빛. 그 빛은 찰나의 순간 꺼져버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로 간 걸까. 다시 내게로 돌아와 줄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성현이라는 친구보다는 서혜가 더 마음에 들었다. 한참을 달리던 중 어디선가 자동차를 부술 듯한 진동음이 울렸다. 조수석 하단에 붙은 수납장 틈에서 하얀 액정 화면의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벨트를 푼 다음 수납장으로 손을 뻗었다.

 ‘혜서방.’

 굳이 역할을 나누자면 서혜가 서방이기는 했다. 서혜는 성현이를 무엇이라 저장했을지 궁금했다.

 “짜잔.”

 “역시 그 차에 있을 줄 알았어요.”

 “어떡하게.”

 “그러니까요. 어디까지 가셨어요?”

 족히 삼십 분은 달려온 뒤였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서혜의 목소리는 다시 숙소로 와달라고 말하기를 어려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성현이가 미안하대요.”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봐.”

 전조등과 비상등을 켜고 이 차선 도로에서 조심스럽게 유턴을 했다. 숙소까지 갔다가 돌아오려면 자정을 넘길 게 분명했다.

 그냥 가서 하루만 재워달라고 할까. 펜션 하나를 통으로 쓰는 걸로 봐서는 내가 잘만한 방 하나쯤은 바로 내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루에 너무 많은 일을 겪은 탓인지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스트레스가 밀려들었다.

 ‘내일 시간을 내서 가져다주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분명 마음은 오늘이 아니라고 알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몸은 이 좁은 도로에서 다시 유턴을 하고 서혜에게 전화를 걸어 마음이 바뀐 이유를 설명하기를 거부했다.

 어디든 들어가 편안히 몸을 누이고 싶었다. 막연한 거부감을 느끼며 그들의 숙소로 향했다. 눈앞을 막아서는 어둠을 헤집으며 도로 위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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