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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종 Nov 05. 2021

초록빛의 흰 바다





 여름이라는 섬(Leave Me in Summer)



 18. 초록빛의 흰 바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마자 어디선가 불어온 후덥지근한 바람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조심스레 길을 건너 오른쪽으로 도니 멀리 손님을 기다리는 렌터카 업체의 미니버스가 보였다. 문자로 전달받은 주차 구역을 찾아가 노란색 동그라미로 숫자 삼이 적힌 버스에 올라탔다. 한산한 분위기에 잠시 의아했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나를 따라 들어온 사람들이 금방 버스를 만석으로 만들어버렸다.

 인기척이 느껴지기에 돌아보니 버스 복도에서 눈빛을 보내오는 사람은 오는 비행기의 옆자리에 앉았던 그 커플의 남자였다. 그는 내게 우리가 서로를 알기는 하지만 밝게 인사할 필요까지는 없으니 긴말은 생략하기로 하고, 여자 친구를 앉힐 자리가 필요하니 옆에 놓인 가방을 치워달라는 이야기를 어설픈 웃음으로 대신했다. 나는 찰떡같이 알아듣고 옆에 둔 캐리어를 다리 사이로 집어넣었다. 잘 들어가지 않는 캐리어를 억지로 밀어 넣자 바닥에 가방을 놓고 선 그의 여자 친구가 내게 등을 돌린 채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어려 보였다. 비행기에서 유심히 살피지 않았던 그들의 겉모습을 곁눈질로 관찰하며 남자의 왼쪽 귓불에 달린 피어싱과 여자의 오른쪽 어깨에 새겨진 열쇠 모양의 작은 문신을 발견했다. 머릿속에서 어떤 이야기를 지어내기에는 다소 부족한 소재였다. 옅은 향기가 풍겨왔지만 내 취향이 아니었기에 약간의 불쾌함마저 느껴졌다. 서로의 취향이 다르다는 데서 뜻밖의 안도감을 느끼며 우리가 탄 버스는 교차로를 지났다.

 커플로 제주도에 오는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둘이 와서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카페에 가든가 말도 안 되는 가격에 돼지고기 몇 점을 구워 먹든가 아니면 그릇만 커다란 갈치조림을 받아 들고 종일 뼈만 바르고 있든가 하는 정도였다. 그들의 여행에는 뜻밖의 장소를 방문하고 기분을 새롭게 하는 즐거움은 있었지만 혼자 올 때나 동성의 친구끼리 올 때만 느낄 수 있는 야릇한 기대감이 없었다. 같은 돈을 주고도 남들에 비해 재미가 적으니 손해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버스 가운데 선 그의 표정은 밝아만 보였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한 여행일까.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둘 사이의 시선에서는 아직 권태나 익숙함을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몇 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사이일지도 모른다.

 나는 묘한 질투심을 느꼈다. 여자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저 다정한 시선에 질투를 느낀 것이다. 한때는 내 것이기도 했던 저 시선을 나도 갖고 싶었다. 연인이나 상대방이 없다는 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저 감정을, 관계를, 시선을 갖고 싶다. 소유하고 싶다. 마음껏 누리다 내팽개치고 싶다.

 소유의 증거는 그걸 마음대로 내버릴 수 있다는 데 있는 게 아닐까. 버리고 싶을 때 버릴 수 없다면 그걸 가졌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내가 가지고 싶은 건 그런 것이었다. 따뜻하고 포근한 것. 나를 강렬히 원하고 내 기대를 충족시켜 주는 것. 하지만 내가 원할 때 바로 내다 버릴 수 있는 것. 내게 필요한 건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이 섬에 혼자 온 것이다.

 다시 보니 그는 볼품없었다. 주위에 널린 헐벗은 여자들에게 눈을 돌리고 싶어도 자신을 똑바로 보는 그녀의 시선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불쌍한 남자였다. 몇 분 전만 해도 내게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던 둘 사이의 시선은 이제 서로를 옭아맨 족쇄였고 서로가 마음대로 포기할 수 없는 한 단계 위의 의무감이었다. 그는 시선을 가진 게 아니라 관계에 종속되어 있었다. 나처럼 혼자 이 섬에 온 사람은 달랐다. 여행에서 맺은 관계가 여행이 끝나며 사라지는 건 암묵적으로 서로가 공유하고 동의한 약속이었다. 나는 그걸 즐기러 온 것이다. 그러니 이 섬이 한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쾌락을 누릴 자격이 있는 이는 오로지 나뿐이다. 여럿이 와도 그들 사이의 질투와 경계, 경쟁의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질 뿐이다. 아름답고 멋진 사람을 향한 경주는 가까운 사이에서 일어날 때야 비로소 추해지지 않던가.

 잠시 서혜와 성현이 사이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런 일을 다시 겪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내게 필요한 건 오직 한 사람이었다. 혹은 두 사람이었다. 아니, 세 사람일지도 모른다. 사실 몇 명이든 상관없었다.

 어느새 마음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데서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밖에 없고 결국 일어나게 될 거라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버스가 멈추고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짐을 챙겨 일어서는 사람들을 따라 나도 버스를 벗어났다. 희고 검은 차들이 늘어선 주차장을 지나 사무실에 들어가자 번호표를 받아 각자의 순서를 기다리는 여행객들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 온 이들은 버벅대며 시간을 끌거나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고 직원이 시키는 대로 차를 몰고 떠나버리거나 둘 중 하나였다. 물론 어느 것도 좋은 행동은 아니었다. 나는 익숙한 동작으로 차를 확인하고 내외부의 사진을 찍은 뒤 직원에게 돌아갔다. 몇 가지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고 키를 받아 나오는 길에 여전히 데스크에서 직원과 입씨름 중인 두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남자의 왼쪽 귀 피어싱과 여자의 오른쪽 어깨 열쇠 모양 문신. 둘은 정말 함께 하는 여행이 처음인 듯했다.

 나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왔으니 일정도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구태여 오지랖을 넓혀 남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었다.

 키를 꽂고 시동을 걸었다. 오랜만에 스마트 키가 아닌 꽂아 돌리는 키를 손에 쥐니 어색하기만 했다. 구식인 차들도 나름의 매력이 있으리라. 쉽게 찾아지지 않는 그 매력을 찾기 위해 애를 쓰며 주차장을 벗어났다. 블루투스가 휴대폰을 잡아낼 동안 나는 이미 바닷가를 달리고 있었다. 서해나 동해의 검은 바다와는 다른 초록빛의 흰 바다. 남은 돈 걱정이 사라지고 이내 잘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이제 신나는 노래를 들을 차례였다.








 다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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