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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종 Nov 08. 2021

홑겹의 커튼





 여름이라는 섬(Leave Me in Summer)



 19. 홑겹의 커튼



 가벼운 걸음으로 들어오자마자 내 눈에 보인 호텔의 로비는 묘하게 고급스러우면서도 싸 보였다. 분명 저 벽에 붙은 대리석 타일은 귀해 보이는데 그 앞에 세워둔 낙타 모양의 조각상은 후진 취향이었다.

 손을 대면 댈수록 상황을 어설프게 만드는 사람들. 절대 승진할 수 없는 사람들. 내 밑에 있으면 골치 아파지는 사람들. 여러 회사에서 만난 숱한 그들을 떠올리며 데스크로 향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들 대부분은 성격이 좋았고 그래서 욕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니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호한 것이다.

 다행히 프런트 직원은 사무적으로 일만 처리하는 사람이었고 오래지 않아 일 층 구석에 위치한 내 방에 짐을 풀 수 있었다. 급하게 가격만 보며 찾은 호텔이라 그런지 예약할 때도 내부 구조까지 확인할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었다. 짐을 풀자마자 신묘한 구조의 이 건물은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디귿은 아름다운 글자다. 보기만 해도 디귿이다. 읽어도 디귿이다. 영어로도 디다. 말장난이 아니다. 나는 디귿이 완벽한 글자라고 생각한다. 항상 사용하던 모습 그대로 디귿을 놓자. 그리고 무거운 크레인 하나를 디귿 옆에 세워두자. 크레인에 달린 갈고리를 디귿의 왼쪽 벽에다 거는 것이다. 그대로 도르래를 돌려 줄을 잡아당긴다. 그럼 디귿은 어떻게 되는가. 그건 더 이상 디귿이 아니다. 비읍에 가까운 무언가다. 목걸이처럼 대롱대롱 매달린 디귿이다. 저 모양에 가까운 글자는 내가 알기로 자판 어디에도 없다. 영어로도 찾을 수 없다.

 매달린 디귿의 왼쪽 아래가 내 방이었다. 그 위로 절반쯤 올라가면 로비였고 로비의 출입구는 다시 왼쪽으로 나 있었다. 갈고리에 매달린 디귿의 벽은 호텔의 복도였다. 저 공간을 왜 방으로 채우지 않았는지 궁금했지만 그건 아마도 이 기묘한 구조의 호텔을 세운 누군가의 감각이리라. 좌우로 흔들리는 디귿의 오른쪽은 왼쪽과 마찬가지로 객실이었다. 호텔의 로비가 왼쪽에 있었기에 오른쪽은 오로지 방으로만 가득했다. 정말 중요한 건 가운데의 빈 공간이다. 이곳에는 하늘이 트인 야외 수영장이 있었다.

 호텔의 안쪽을 바라보는 객실들은 모두 수영장을 향해 창을 내고 있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창을 열고 테라스 밖으로 나오면 수영장 주위에 누운 사람뿐만 아니라 반대편 객실에 있는 사람까지도 단번에 그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는 어이없는 구조였다. 심지어 같은 층의 건너편 객실은 커튼만 걷으면 방 한 면을 차지한 통유리창 너머로 방의 내부가 훤히 보일 지경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샤워실 내부를 훔쳐볼 수 있는 모텔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서로의 사생활을 가려주는 유일한 수단이 홑겹의 커튼 한 장이라는 사실은 그나마 이곳이 모텔보다는 낫다는 걸 알려주는 동시에 이 기묘한 구조의 호텔을 고안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궁금증까지 불러일으켰다. 인터넷을 검색해도 필요한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정신이 이상한 변태가 아닐까 추측했지만 그냥 자기도 열심히 돈을 들여 짓다 보니 이렇게 된 걸지도 몰랐다.

 커튼을 걷자 창밖으로 건너편 방이 보였다. 그곳에 들어온 사람도 이미 이 사태를 눈치챘는지 오른쪽 왼쪽 빈틈없이 커튼을 꼭꼭 닫아두고 있었다. 한두 층 위의 다른 객실도 마찬가지였다. 서로를 바라보는 모든 객실이 서로를 향해 커튼을 닫고 있었다. 아마 설계자도 이런 결과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기껏해야 오 층 테라스에 나와 일 층 수영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와 아내를 향해 손을 흔드는 남편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알고 보니 객실에는 내연녀가 있는.

 이 섬에 오면서부터 내 머리는 자꾸만 이상한 방향으로 돌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새벽 비행기를 타느라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다. 허기를 느끼고 방을 나서려는 찰나 어디선가 들려온 약한 신음을 들었다. 미처 가리지 않은 창밖에서 들려온 소리 같았다. 유리창으로 다가가 테라스로 나가는 문고리를 잡아당겼지만 창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위층에서 들려온 소리일지도 모른다.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커튼이 쳐진 건너편 방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커튼의 짙은 색에 가려 그곳에 누가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방을 나서려는 순간 또 그 소리가 들렸다. 분명 창밖이었다. 이 정도면 다른 객실의 사람도 들었어야 마땅했다. 잠긴 창을 열고 테라스로 나왔지만 나처럼 궁금해하며 소리에 반응하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찾을 수 없었다. 건너편 방을 다시 살펴보았다. 잠깐 커튼이 흔들리는 듯했지만 착각일지도 몰랐다.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내 방 창문에도 커튼을 쳤다. 단번에 어두워진 방 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더 밝은 분위기에서 지내고 싶었는데. 하지만 커튼을 걷었을 때 이곳을 쉽게 들여다볼 건너편 객실의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아까 들은 그 소리도 마음에 걸렸다.

 조금이라도 소음이 줄어들기를 바라며 방을 나섰다. 이제야 직원들은 객실을 청소하고 있었다. 운 좋게 빈방이 아니었다면 나도 꼼짝없이 트렁크에 캐리어를 싣고 오후 내내 거리를 돌아다녀야 했으리라. 그런 짐 덩어리들이 자동차에 실린 것조차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나는 홀가분해지고 싶었다. 정말 사소한 것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러니 저 객실에서 들은 오전의 소음마저 이렇게 마음을 귀찮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홀연히 방을 나와버리면 그만인 것을.

 내가 방문할 첫 장소는 해장국집이었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름난 소고기 해장국집이 있다고 했다. 그곳에서 적당히 요기를 마치고 카페나 관광지나 길가에 있는 풍경이 좋은 곳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닐 것이다. 오 년 전 그날처럼, 막연한 기대만 품고, 걸림 없이 자유롭게.








 다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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