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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종 Nov 03. 2021

한 사람의 얼굴

 *1부 16화에서 이어짐 : https://brunch.co.kr/@sjkimwrite/143






 여름이라는 섬(Leave Me in Summer)



 17. 한 사람의 얼굴



 무작정 여행을 떠나는 이의 마음엔 두 가지 생각이 깃든다. 하나는 막연한 기대와 희망이다. 그곳에 가면 무언가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그게 내 삶을 바꾸고 생활을 갱신하며 전에 없던 활력을 불어넣어 주리라.

 다른 하나는 다소 은밀하면서도 야릇한 문란함이다. 그곳에 누군가 있으리라. 그가 내 안의 야성을 깨우고 은밀한 유혹과 강렬한 쾌락의 기억을 선물해주리라.

 급행 지하철을 타고 공항에 내린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품은 그림은 나를 기다리는 무언가와 나를 유혹해줄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아직 눈코입이 달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의 눈썹은 누구의 눈썹과도 닮지 않았고 그의 입술은 아직 내게 아무런 약속도 해주지 않았다. 전체적인 실루엣만이 그가 사람이고 여자이며 나를 사랑한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렇다. 정말 중요한 것. 그는 이미 나를 원하고 있다. 누가 그인지만 찾아내면 되는 것이다.

 공항 입구를 지나 터미널을 통과해 게이트 앞에 서기까지 마음속 그녀의 모습은 여러 번 바뀌었다. 그녀는 지나가는 승객의 얼굴을 닮기도 했고 가방을 밀고 사라지는 스튜어디스의 뒷모습이기도 했다. 그녀는 원숙한 여인이었으며 철없이 어린 여자아이이기도 했다. 그녀는 짧은 단발이었다가 긴 생머리가 되었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스커트를 입었다가 아예 벗은 듯한 반바지 차림이기도 했다.

 누가 그녀가 될지 몰랐기에 아무런 편견 없이 그녀의 모습을 그저 바뀌는 대로 놓아두었다. 어느 순간 한 사람의 얼굴이 되어있을 걸 알기에 마음은 걱정하거나 혼란스럽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오른 비행기가 천천히 왼쪽으로 돌아 바다를 끼고 날기 시작했다. 옆자리에는 커플이 앉아서 어떻게 해볼 게 없었다. 한 시간도 되지 않는 짧은 낮잠이면 도착할 것이다. 에어컨을 끄고 나왔는지 문득 신경이 쓰였다.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 에이, 설마.

 딱 일주일이었다.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긴 시간이었고 그 이상은 희망이니 기대니 하는 말로도 내 이성을 설득할 수 없는 어리석음과 허영의 영역이었다.

 뚜렷한 목적을 정한 건 아니었다. 설령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잠시의 흥분과 즐거움만으로도 내 삶은 한층 더 나아질 것이다.

 무릎에 놓인 에코백을 열고 집에서 가져온 안대를 꺼냈다. 뒷사람에게 불편이 가지 않도록 조심스레 의자를 누이고 두 눈에 안대를 둘렀다. 깜깜했다. 이게 네 미래라던 농담이 생각나 웃음이 터졌다. 옆자리의 커플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 그리 신경 쓸 건 아니었다.








 다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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