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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종 Nov 01. 2021

현명한 행동





 여름이라는 섬(Leave Me in Summer)



 16. 현명한 행동



 ‘솜솜.’

 아직 그 번호는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었다. 너무나 뜬금없는 별명이었기에 몇 년 동안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참을 잊고 있었다. 메신저를 열어 그녀의 얼굴을 찾았지만 프로필 사진은 어느 한적한 해안의 풍경만 보여줄 뿐이었다.

 이렇게 저장했으니 알 턱이 없었다. 그날 펜션으로 데려다 줄 때도 연락하지 않을 마음이었으니 굳이 찾아볼 생각도 없었으리라.

 폭포를 다녀온 다음 날 그녀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 자기랑 놀 생각이 있냐는 단순한 물음이었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서혜를 먼저 내보낸 뒤 그녀는 나를 불러 차를 타고 서귀포에 있는 내 숙소까지 이동했다. 서혜가 북서쪽 해안 드라이브 코스와 카페를 다녀올 동안 우리는 서귀포 근처에서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의 섹스는 나쁘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지만 그녀는 서혜의 번호를 지우게 하고 펜션으로 돌아가 버렸다. 서울에 와서도 나는 연락하지 않았고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내게 남은 건 삼 일간의 추억뿐이었다.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언제 해가 졌는지도 모르게 빛은 사라져 있었다. 불을 켜려면 침대에서 일어나야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다시 연락할까 고민했지만 그럴 일은 아니었다. 그녀의 번호를 지울까도 생각했지만 이제 와 그럴 일도 아니었다. 다시 제주도에서 겪은 일들이 떠올랐다.

 바람, 구멍 뚫린 돌, 의외로 소박한 공항의 풍경, 늠름한 스타벅스의 간판, 개구리.

 개구리, 개구리들. 붉은 핏자국, 노루, 눈꺼풀, 어둠 속에서 깜박이던 눈꺼풀의 움직임, 보이지 않는 눈동자, 살며시 다가오는 발걸음, 그녀, 혹은 그녀. 부드러운 몸과 살결까지.

 숨이 가빠왔다. 침대에 누워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마음이 안정되자 숨이 바로 쉬어지기 시작했다.

 무서웠다. 내가 무얼 무서워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무서웠다. 제주도, 사흘, 그 일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낸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답장이 없는 이력서 전송과 부질없이 지나가는 여름과의 이별뿐이었다. 어차피 서울에 있으나 제주도에 있으나 전자우편으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보내는 건 마찬가지였다.

 휴대폰으로 계좌 잔고를 확인하고 앞으로 삼 개월을 더 버티려던 계획을 이 개월로 수정했다. 값이 오를 대로 오른 비행기 티켓 값을 애써 무시하며 내가 머물 만한 숙박업소를 물색했다. 하지만 성수기 중의 성수기인 탓에 터무니없는 가격의 호텔 객실만 계속해서 갱신될 뿐이었다. 그나마도 마감 임박이라는 태그가 붙어 반짝이는 불빛으로 내 눈을 유혹했다. 당장 떠나려면 다른 방도가 없었다.

 ‘윤진아. 너를 아끼니까 하는 말인데, 무턱대고 일부터 벌이는 건 그리 좋지 않아.’

 한 달 전 충고를 건네던 부장의 말이 떠올랐다. 또 멍청한 일을 벌이는 게 아닐까. 아무런 대안도 없이 회사를 뛰쳐나온 것처럼, 오 년 전 그날도 별생각 없이 막연한 기대와 환상 아래 홀로 제주도로 떠난 것처럼 나는 또 인생에 어리석은 행동 하나를 추가하고 있는 게 아닐까. 막 결제 버튼을 누르려던 손가락이 머뭇거렸다.

 바보 같은 짓일지도 모른다. 아니, 바보 같은 짓이 맞다. 언제 취업이 될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한 달에 쓸 돈을 다 털어 여행을 떠나는 게 현명한 행동일까.

 당연히 현명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왜 그곳으로 떠나려는 걸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제야 알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현명함이 아니었다. 되지도 않는 취업 끈을 붙잡기 위해 얼토당토않은 소설을 써가며 자기소개서를 보내고 한 달을 방 안에 틀어박혀 지나간 일들만 꿈처럼 되꾸는 내게 필요한 건 현명함이 아니라 희망이었다. 오 년 전과 마찬가지로 나를 이끄는 건 막연한 기대였다. 잡히지 않는 것,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달리면 달릴수록 손에서 멀어지기만 하는 것. 더러는 어리석다고도 하는 그것이야말로 나를 움직이게 하고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끼게 만드는 힘이었다.

 바로 버튼을 눌렀다. 입력한 신용카드 정보가 전송되고 곧이어 새 창이 떴다. 가장 빠른 비행기를 예약했기에 오늘 밤 바로 준비를 마쳐야 했다. 내일 새벽 김포공항을 떠나는 첫 비행기 어딘가에 내 자리가 있을 것이다.

 문득 내 안에서 솟아나는 무한한 에너지를 느꼈다. 방금까지 침대 위에 늘어져 있던 사람은 온데간데없었다. 다시 희망의 정수리에 코를 박고 숨을 불어넣고 있었다. 바람이 새는 풍선처럼 어디론가 날고 있었다. 힘없이 떨어지는 고무 조각이 눈에 선명히 보였지만 세차게 고개를 저어 그 모습을 떨쳐냈다.

 가야 한다. 어디론가 가야 한다. 더 멀리, 계속해서 움직여야 한다. 물살을 거슬러 노를 젓는 사람처럼 안간힘을 쓰며 속옷과 짐을 챙겼다. 이따금 무서운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나는 그걸 외면하기로 마음먹었다.








 「여름이라는 섬(Leave Me in Summer)」 1부 끝

 *2부에서 계속 : https://brunch.co.kr/@sjkimwrite/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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