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라는 섬(Leave Me in Summer)
15. 마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을 떴다. 언제 눈을 감은 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느새 햇살은 침대에서 벽을 향하고 있었다. 왼팔을 베고 누운 그녀의 입가에서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꼬박 밤을 새운 날이면 어느새 햇빛과 함께 창 너머로 들어오던 새소리. 생각이 많은 날이면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눈을 감아도 머릿속은 온갖 목소리와 색깔들, 물건들, 사람들이 떠다녀 어질어질한 가운데서 이른 아침을 맞이해야 했다. 그에 비하면 섹스가 끝난 뒤의 낮잠은 구름 위의 수면이었다.
손바닥을 침대 시트에 대고 천천히 문질렀다. 손으로 전해오는 매끄럽고 부드러운, 그리고 조금은 부끄럽게도 젖은 듯한 느낌이 다시 몸을 간질였다. 사냥개처럼 물 곳을 찾으려는 입술을 다독였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를 데려오기 위해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그녀의 입술을 물고 허벅지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살덩이 사이에 눌린 손등의 온기, 엄지손가락 마디로 느껴지는 젖은 물기. 모처럼 깊은 잠을 잔 것처럼 평온한 표정을 지은 그녀는 쉬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으려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처럼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가 깊은 잠으로 빠져드는 찰나의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눈을 떴다.
“또 장난치고 있었지.”
“아니야.”
아예 내 말을 믿지 않기로 작정한 눈치였다. 내 말과 반대로 생각하면 모두 정답이라 여기는 듯했다. 자세를 바로 했지만 힘이 들어간 하체가 불편해 다시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녀는 눈을 감고 절반쯤 잠든 상태를 즐기고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소리 없이 내쉬는 호흡이 그녀가 잠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무심코 턱을 만지려다 얼굴에 손이 닿는 걸 싫어하는 그녀의 성질이 생각나 그만두었다. 그녀에게는 조심할 게 많았다.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서혜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에게 필요한 배려는 이런 게 아니었다. 내 말과 행동에 숨은 관심과 사랑.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보인 말과 행동 너머에서 풍겨오는 소중함 혹은 다정함의 기운이었다. 그러니 어떤 행동이라도 향기를 머금고 있다면 그녀는 따뜻하게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치 새벽 어스름 같은, 유치원 가방을 그린 듯한 찻잔을 보며 우리가 나눈 대화처럼.
성현이는 구체적인 것을 바랐다. 얼굴에 손을 대지 않는 것, 차를 운전할 때는 어지럽게 하지 않는 것, 자거나 하기 전에는 미리 알려주는 것,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한마디 말이나 한 가지 행동에 관한 분명한 약속이었다. 이런 상황이 오면 이런 행동을 하라는 것. 어쩌면 보통의 남자에게 필요한 여자는 성현이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잘 자네.”
“오랜만에 푹 잤어.”
“나도 아무 생각 없이 잤어.”
“더 자고 싶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을 댈 수 없는 곳은 얼굴뿐인 듯했다. 여전히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끙끙거리진 않던데.”
“뭐가.”
나긋한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잘 때 말이야. 끙끙대거나 불안해 보이진 않던데.”
다시 그녀가 눈을 떴다. 어제 카페에서처럼 그녀의 눈동자 속으로 알 수 없는 힘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어제와는 다른 분노였다. 무언가를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녀는 이 순간을 그냥 지나칠 마음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누가 말해줬어.”
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서혜구나. 걔밖에 없지 어차피.”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침묵의 의미를 바로 알아차렸다.
“어디까지 말했어.”
“잠버릇을 이야기하길래 너도 그런 게 있는지 물었어. 조금 끙끙대거나 몸을 떨어서 자기가 안아주거나 손을 잡아준다고 했어.”
“그런 얘기를 왜 오빠한테 해?”
나는 이런 대화에 익숙하지 않았다. 방금의 한 문장으로 그녀가 내게 준 역할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게 무엇인지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잠시 머뭇거리는 순간 그녀가 대답할 기회를 가로채 갔다.
“아무것도 못 들었어?”
“뭘?”
“그거 말고 더 들은 거 없냐고.”
“없어.”
“진짜지.”
알람이 울렸다. 그녀를 펜션으로 보내줄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맞춰둔 휴대폰 알람이었다. 화면을 긁어 알람을 끄자 그녀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서혜 번호 있지.”
“응.”
“걔 번호 지워.”
나는 섬짓한 기운을 느꼈다. 그건 마음이나 감정의 움직임이 아닌 몸의 떨림이었다. 머리가 이해한 감정이 아니라 심장 부근 어디에선가 조심스레 흔들리는 찬장 끝의 유리병이었다. 자칫하면 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마음을 스쳤다. 지금 내 곁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게 무엇인지를 나는 정말로 알지 못했다. 그녀가 보는 앞에서 번호를 지워야 했다.
“정말?”
“돌아가서 걔한테 연락할 거야?”
조금은 그럴 마음이 있었기에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와 어울리는 사람은 서혜였기 때문이다. 성현이는 필요가 분명한 사람이지 나와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수준의 배려가 있는 사람이라면 오늘 그녀의 곁에 누울 수 있었으리라. 내가 가진 취향과 습관, 감정과 생각에 그녀는 관심이 없었다. 그것들에 공감하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왜 이제야 한꺼번에 떠오르는 것일까. 그녀의 브래지어 끈을 풀고 팬티를 집어던질 때만 해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던 것들이 왜 이제야 새삼 깨달은 것처럼 떠오르는 걸까.
이미 때는 늦었다. 방금까지 나와 함께 쾌락을 공유한 여자의 요구를 눈앞에서 거절할만한 용기가 내게는 없었다. 그녀가 시키는 대로 휴대폰의 잠금을 풀었다. 주소록을 열고 서혜를 찾았다. 화면에 뜬 그녀의 번호를 누르자 삭제키가 나타났다.
나도 모르게 성현이를 보았다. 그녀도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그날의 창틀 뒤에서처럼 그녀는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보던 건 꽃이 아니었나 보다.
“안 지울 거야?”
버튼을 눌렀다. 3357, 그 뒤의 네 자리가 기억나지 않는다. 0, 0으로 시작했던 것 같다. 나는 그녀의 번호를 잊어버렸다.
“내 번호 아직 저장 안 했지.”
아직 꺼지지 않은 휴대폰을 그녀가 가져가 버렸다. 그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름으로 저장 안 할 거야. 나는 이름으로 저장하는 거 안 좋아해.”
“뭘로 저장할래.”
“나 보고 생각나는 거 없어?”
작은 가슴이, 잔혹한 파괴자, 까칠이, 번거로우미, 손 많이 가니. 생각나는 것마다 그녀가 좋아하지 않을 것들뿐이었다.
“없는데.”
그녀가 잠시 생각하더니 무언가를 입력하고는 휴대폰을 돌려줬다.
“옛날에 친구가 지어준 별명이 있어. 그대로 저장했으니 꼭 기억해야 해. 알았지?”
“당연하지. 그게 뭔데?”
“솜솜.”
“솜솜?”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궁금해졌다.
“왜 그거야?”
“이름을 바꾸고 싶다고 했거든. 내 이름은 너무 옛날이잖아. 나보다 열 살이나 스무 살은 많아 보여.”
“박성현, 좀 그렇긴 하네. 솜솜이라는 이름을 갖고 싶었던 거야?”
“아니, 바보야. 누가 이름을 그렇게 지어. 소미라는 이름을 갖고 싶었어. 걔만 나를 그렇게 불러줬거든. 소미야, 이렇게. 그러다 그걸로 별명까지 지어준 거야.”
“멀리도 갔다.”
그녀가 천장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 친구는 그녀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은 듯했다. 오늘의 우리도 그런 추억으로 남게 될지 궁금했지만 누구 하나 대답해줄 사람이 없었다. 내 마음은 이미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3357, 0. 자꾸만 서혜의 번호가 외워졌다. 기억나는 부분까지만 생각나 속으로 그걸 되뇌고 있었다. 우리를 아는 사람은 성현이밖에 없었다. 그녀의 번호를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다른 생각을 하는 걸 숨기기 위해 나는 옆에 누운 그녀를 세게 끌어안았다. 내게 안긴 그녀가 어깨 위에서 조그맣게 숨을 쉴 동안 한구석 어둠 위로 조용히 서혜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서울에서 우리가 마주칠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성현이를 만날 수는 있었다. 내게는 한 사람의 번호가 있었다.
이유를 생각하기도 전에 마음은 이미 답을 내려놓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돌려보내기 위해 안았던 팔을 풀었다.
다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