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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였냐?

예비비가 없다.

by 송주

#1

매달 정해진 경조사나 큰돈 드는 때는 모두가 아는

부모님 생신, 어버이날, 명절 등이 있으니

이때는 미리 월급에서 경비를 빼놓곤 했다.

나는 프리랜서라 당연히 명절 상여금 같은 건 받아 본 적이 없고 아쉽게도 남편 역시 연봉제로 급여 체계가 바뀌면서 매달 고정급을 받았고 명절에 따로 나오는 떡값 같은 건 없다.

명절이든 생신이든 부담이 안 된다면 새빨간 거짓말일 터

하지만 자식 된 도리로 부모님께 이 정도도 못하면 안 되지 싶어 양가 어른들을 공평하게 챙겨 드리고 있다.


모두가 다 아는 저런 연례행사를 제외한 30대의 경조사비가 대부분 돌잔치와 결혼식이었다면 지금은 부고장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


우리나라 장례는 대개 삼일장이라 발인이 있는 삼일째 되는 날 전에 미리 조문해 슬픔을 나눠야 한다.

슬픔을 나누기도 하지만 얼굴을 비춰야 하는 경우도 있다. 얼굴을 비추치 못하면 봉투라고 나눠야 한다.


얼마

그 달은 유독 부고장이 쉴 새 없이 날아왔다. 우산 없이 맞는 비처럼 날아드는 부고장을 나와 남편은 맞고 있었다.

대부분이 남편의 지인 또는 회사 동료의 부모님 부고였다. 남편의 회사 내 직급으로 봐서 어쭙잖은 금액을 봉투에 넣어다가는 체면을 구기게 될 수도 있으니 봉투 속에 들어가는 금액은 항상 10만 원부터다.

상무님 아버지 부고, 여직원 아버지 부고 등

날짜가 정해진 결혼식이나 돌잔치라면 미리 청첩장이나 초대장 받아 마음의 준비라고 할 수 있고 여유가 된다면 물질적 준비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부고장 같이 별안간 통보되는 조사의 경우 슬픔에 앞서 돈부터 걱정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건 아주 솔직한 내 마음이다.


.그 달이 그랬다.

10만 원 20만 원씩 나가던 부조금이 100만 원을 찍던 날, 난 죄 없는 남편에게 볼멘소리를 해 댔다.

남편도 연타로 날아드는 부고장에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지만 내가 대뜸 싫은 소리를 해대자

기분이 상했는지 되받아치며 내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죽였냐?"

순간 어이없는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꾹 참았다.


방으로 들어가 검은 양복을 챙겨 입고 나온

남편은 체념한 듯 내게

'이제 더 죽지만 않으면 된다.'라는

씁쓸한 말을 남기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그 뒤 경조사비로 100만 원까지 지출되는 경우는 아직 없지만 예비비가 단 한 푼도 없는 프리랜서인 나와 월급쟁이 남편은 경조사비에 늘 무방비 상태가 되어 바들바들 떨고 있다.


#2

결혼 후 가정을 꾸리게 된 후 지출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한땡땡 과 김땡땡의 딸이었을 때는 부모님 틈에 슬쩍 껴서 내가 특별히 부담을 가져 할 경조사비는 없었다. 하지만 결혼 후 나와 남편은 독립 된 가정의 주인이자 어른의 자리에 서게 됐고 사람의 도리에 그 만큼 더 신경을 써야 했다.

내 아버지는 8 남매 중 차남이고 어머니는 6남매 중 맏이이다. 내 밑으로 사촌 동생들이 한 소대 인원이다. 어느 시점 부터 사촌 동생들의 청첩장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축하의 마음을 담은 축의금 봉투를 내는 손이 떨릴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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