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깊게 파 보자.
올해도 겨울은 쉽사리 봄을 내주지 않을 것 같다.
힘든 계절이 돌아왔다.
따뜻함을 기대하던 누군가에게 이내 실망을 주며 주저앉히는 계절이 이때다.
주말 포근했던 날씨가 하루 사이에 한겨울로 회귀했다.
애꿎은 계절에 봄이 오는 건 맞냐는니? 원망 섞인 푸념이 쏟아진다.
두꺼운 옷들을 겹겹이 공 들여 껴입어야 하는 추운 날 보다 가볍게 입고 휙 나갈 수 있는 날이 더 좋다. 그래서 나는 누구보다 따뜻하거나 더운 계절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사람이다.
기다리면 언제 왔냐는 듯 곁에 와 있을 계절에 이렇게 나는 늘 조바심을 낸다. 동남아가 체질 인가 보다.
소설을 좋아한다. 자기 계발서 보다 소설 속 이야기가 더 재미있다.
중학교 때 이우혁의 퇴마록에 푹 빠져 있었다.
다음 책이 나올 때를 손꼽아 기다리다 책 대여 방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때는 비디오와 책을 대여해 주는 그런 가게가 있었다. 사춘기 소녀의 감수성과 호기심에 영화도 책도 참 많이 빌려 봤던 시절이었다.
퇴마록처럼 초반부터 휘몰듯 사람을 몰입시키는 소설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소설들도 있다. 그럴 때면 재미가 없어도 마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듯 참으며 정독한다. 그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소설 속에 내가 들어가 있곤 했다. 하루키의 1Q84 도 그랬다. 1권 400페이지를 넘어설 때쯤 호기심이 생기고 다음 이야기 궁금해졌다. 책을 놓아둔 집안 소파나 책상을 떠올렸다. 책이 손에 잡혀 읽히는 그 순간을 생각하며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아주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보통 추리 소설이나 오컬트 물은 처음부터 눈을 못 떼게 만들지만 널리 이롭다고 알려진 소설들은 초반에 약간의 인내심이 필요한 듯하다.
책을 읽은 행위도 인내심이 필요한데 하물며 자식을 키우는 것은 말해 뭐 할까?
하지만 아들들을 키우면서도 나는 꽤 조급한 엄마였다.
뒤집고 배밀이를 하고 기고 걷는 모든 과정을 따뜻하게 기다려주기보다 조급한 눈빛을 담아 바라본 시절이 있었다.
아들들이 중고등학생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주변 친구들은 모두 뛰는데 저 홀로 느린 걸음으로 유유자적 걷는 아들들의 성적표는 언제나 실망으로 나를 주저앉혔다.
따뜻함을 기대하고 나갔다 호된 꽃샘추위에 벌벌 떨고 들어오는 사람처럼 언제나 초췌해졌다.
나는 수시로 조급해졌다.
아들들이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끝없이 달리길 바랐다.
하지만 나도 알고 있다. 내 바람처럼 아이가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에도 엄마는 따뜻한 햇살처럼 그윽한 눈빛으로 아이를 기다려 주어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명제와 같다. 나는 독서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지 못했고 사람 육아라는 큰 벽에 수시로 부딪혔다. 그때마다 엄마라는 존재의 자격을 운운하며 괴로워하곤 했다.
자식을 키울 때는 이 세상 어떤 일 보다 강한 인내심이 필요하지만 나는 늘 조급할 뿐이었다.
새해부터 배우기 시작한 테니스 레슨이 두 둘째에 접어들고 있다.
얼마 전 테니스 레슨을 받고 온 후 심각한 근육통이 생겼다. 그리고 새벽에 잠을 깨 뒤척이기 시작했다.
머리, 어깨, 무릎, 발 중에 머리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욱신 거리며 아팠다. 가뜩이나 형광색 공과 테니스 채가 접점을 이루지 못하고 공중에서 장렬히 바닥으로 내리 꽂히는 중인데 근육통이라니 아주 쪽팔린다.
가만히 누워 통증이 잦아들고 얼른 잠이 들기를 기다렸다. 그때 어디선가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조용한 집안에 울려 퍼지는 웅웅 거리는 저음의 말소리, 큰 아들이었다. 누군가와 속닥속닥, 꽁냥꽁냥 통화를 하느라 늦은 새벽까지 자지 않고 있었다.
"잡았다."
나는 큰 아들이 매일 아침 못 일어나고 늦잠을 자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참았어야 했나? 참았어야 했다. 하지만 참지 못했다.
나는 아들 방의 방문을 무지성으로 열고 버럭 소리를 질러 버렸다.
"자!! 아침에 늦게 일어나면 알아서 해."
나는 아침에 늦잠을 자면 디질랜드로 보내버릴 거라는 암시를 담은 사나운 눈빛을 아들에게 쏘았다. 그 후로도 잠시 미친 황소처럼 씩씩 코바람을 쏟아 냈다.
아침이 밝았다. 역시 아들은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나는 다시 참지 못하고 아들 방으로 쳐들어가 이불을 홀라당 가져와 거실로 던져 버렸다.
내 인내심의 우물은 아들에게 참으로 작고 얇다. 이러다 우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된다. 아들은 팬티 바람으로 주섬주섬 이불을 가지러 나와 다시 거실에 누워 버렸다.
"아이~~ 엄마 일어나게~~"
애교 섞인 콧소리...
하~~
이 녀석은 참고 있구나~~
가장 사랑하는 대상에게 매번 가장 박한 엄마가 되어 버리고 나는 오늘도 돌아서서 반성을 했다.
아들이 선물해 준 작은 빗을 유독 자주 만지작 거리게 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