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선택은 언제나 해보자였다.
일을 시작한 지 일 년이 지나고 아들들이 4살 6살이 되었다. 아들들은 집 근처 몬테소리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었다. 아들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은 지역 내에서 꽤 규모가 있는 교육 기관이었고 방과 후 3시 30분부터 영어 특성화 수업을 따로 진행하고 있는 원이었다. 쉽게 부설 어학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내게 들어온 제안은 내 아들들이 다니는 어린이집 방과 후 영어 강사로 주 5일 일하는 조건이었다. 좋은 조건이었다. 유아들이 하원하는 3시 이후에 진행되는 방과 후 수업은 페이와 경력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멋진 기회였다.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아들들과 함께 퇴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도 나지만 학부모를 강사로 채용해야 하는 원장님 역시 난감하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외부강사들은 학부모가 못 보는 원의 다른 모습을 보곤 한다. 잠시 잠깐 방문해 수업하는 나 같은 사람 일지라도 조금은 알 수 있다.
아이들에게 "너는 하루도 안 빠지고 원에 오면서.."라는 해선 안 될 말을 퍼붓는 선생님
외부 강사를 무시하며 없어진 수업 교재를 찾아주지 않았던 비협조적인 선생님
월급을 상습적으로 늦게 주고도 내 카드값 나갈 날짜를 묻던 뻔뻔한 원장님
수시로 수업을 간섭하며 이래라저래라 하는 원장님
학부모 앞에서는 예쁜 미소와 친절을 겸비한 그들의 다른 모습이었다.
출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에는 언제나 선택(choice) 있다. 그것을 A, B, C라고 한다. 나도 원장님도 선택의 기로에 섰다. 학부모 입장에서의 윈장님과 고용주 입장에서의 원장님은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고작 1년 일한 초보 강사인 내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원의 결정이었다. 내가 일을 하고자 한대도 원에서 학부모 영어 강사는 부담스러워 거절의 뜻을 내 보인다면 내 고민 역시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장고 끝에 일을 하는 쪽으로 한 수를 두었다. 물론 원의 수락이 떨어진다면 말이다. 하지만 입을 먼저 떼 적극적으로 내 마음을 전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원감님께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니 저희가 생각해 봤는데요"
심장이 쿵쾅 거렸다.
"어머니 일 하셔도 돼요."
원감님은 원장님과 상의 끝에 나를 방과 후 영어 교사로 채용하기로 했다는 말을 전했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 이런 거구나.
걱정에 앞서 막힌 물줄기가 뚫린 듯 답답함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곧 나는 다시 처음 일을 시작하는 사람처럼 긴장됐다.
인생에서 많은 처음을 겪어야 하는 건 숙명과도 같다. 나는 그 무수한 처음 중 하나를 늘 겪으면서도 늘 피하고 싶었다. 그때도 그랬다. 과연 내 선택이 옳았을까? 괜히 학부모가 아들의 어린이집 수업을 한다고 했다가 내 민낯이 드러날까 겁도 났다. 반대로 원 입장에서는 내 채용을 후회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렀다. 수업 시작일이 다가왔다. 입이 마르고 손에 땀이 쥐어졌다.
아들에게 엄마가 영어 수업을 할 때만큼은 엄마가 아닌 "루비 티쳐"라고 일러두었다.
첫 수업을 하는 날 원에 도착해 이층 교실로 발걸음을 뗐다. 발 밑에 찐득이가 붙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교실 안 옹기종기 앉아 있는 어린이들 틈에 내 아들도 아파트에서 나를 이모라 부르던 지인의 아이들도 있었다. 또 아이의 지난해 담임 선생님도 계셨다.
나는 일단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렇게 수업이 시작됐다.
못 해요 하기보다 해보자는 1의 마음으로 시작한 아들의 어린이집 영어 강사 일이었다. 1의 마음만 있으면 된다. 그 사소한 1만 보고 도전해 보는 것! 99의 걱정, 근심은 접어 두는 용기
입이 마르는 첫 수업을 시작으로 오랜 시간 나는 짤리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말이다.
고용인 입장에서 본 원장님의 모습은 학부모 입장일 때와 다를 게 없었다. 원장님은 따뜻한 분이셨다. 초보에게 관대한 분이셨고 잘하는 거에 앞서 됨됨이와 노력을 보시는 분이셨다. 공으로 일을 시키는 법이 없으셨고 월급이 밀리는 일도 없었다. 원장님은 좋은 보스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원장님도 원감님도 그때 굳이 내가 아니었어도 누구든 마다하지 않으셨을 분이셨다.
한해 한해 일은 자리가 잡혀갔고 나 역시 노련해지니 시작했다. 매해 기대 이상으로 수업이 채워지며 월급도 점점 늘어갔다.
분양받은 아파트 빚도 열심히 갚아 나갔다.
다음 편 이야기는 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