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를 위한 나라는 없다.
지사장님의 전화였다.
"수업 분위기 어땠어요?" "Greeting은 했어요? 애들 반응은 어땠어요?" 질문이 쏟아졌다.
긴장되는 첫 수업 날이었다. 처음은 누구에게나 쉽지가 않다.
나는 그날 4살 꼬맹이들 사이에 덩그러니 놓였다.
3월 처음 엄마 품에서 떨어져 낯선 환경에 놓이게 된 꼬맹들과 내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색하고 긴장 됐다. 그때 꼬맹이 한 명이 울기 시작했다. 곧 교실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엄마를 찾아 눈물 콧물을 흘리며 우는 소리로 교실이 가득 찼다. 내 아이만 보다가 많은 아이들 틈에 둘러싸여 그 광경을 봐야 하는 자체로 식음땀이 흘렀다. 나도 엄마가 보고 싶었다. 수업을 시작도 하기 전에 꼬맹이들 달래기 미션을 수행해야 했다.
그때 가장 큰 고민은 바로 영어로 달래야 하나? 한국어로 달래야 하나? 하는 문제였다. 경험이 부족한 탓에 나오는 미숙한 고민이었다.
그래, 나는 영어 선생님이니 영어로 달래자!
잠시였지만 고민 끝에 해탈한 사람처럼 나는 크게 소리쳤다.
Don't Cry
차라리 Don't cry 노래를 한 곡 뽑았음 덜 기억에 남았을 것 같다.
교실은 대성통곡의 도가니가 되었다. 엄마를 불러대는 꼬맹이들 틈에서 나는 선생님도 그 무엇도 아닌 먼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원장님은 지사에 전화를 걸어 바로 교사 교체를 요구했다. 나는 처음 배정받은 원에서 빛의 속도로 잘렸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수치스러운 해고 전화에 좌절감을 이겨 내기 힘들었다.
거울 속 내가 그렇게 못나 보이긴 처음이었다. 쥐뿔개뿔 해 놓은 것도 없고 남들보다 열심히 산 것도 아니었다. 그 대가를 받는 것이라 생각했다.
내 인생의 최고 바쁜 시기가 시작 됐다.
갈 길이 멀었다. 교육은 더 힘들어졌고 밤새 수업 준비에 공을 들였다.
나는 일과 관련된 스펙을 쌓고 실력을 키우기 위해 파닉스 전문가 과정에 도전했다. 그리고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낸 후 회화 공부를 했다. 화상 영어, 회화 스터디 그룹 들에 가입해 기본 회화부터 다시 익혀 나가기 시작했다. 영어 자격 시험에도 도전해 이력서에 한 줄 두 줄 내 스펙을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쉽지 않았지만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앞만 보고 내달렸다.
적은 돈이었지만 월급이 나오니 숨통이 틔이는 느낌이었다. 한 학기가 지나자 좀 더 많은 수업이 내 시간표에 채워지기 시작했다. 일이 익숙해진 건 아니었다. 유아들을 상대하는 일이라 쉬워 보일 수도 있지만 이직률이 상당히 높은 직업이 바로 이 일이었다. 함께 교육을 받던 많은 선생님들이 다른 길을 찾아 나섰다. 나는 그냥 버티기로 했다. 딱히 갈 곳도 없었고 다시 집에 눌러앉는 건 더 싫었다.
수업이 늘어나면서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아졌다. 학부모 참여 수업 기간이 되면 한 달 전부터 걱정에, 준비에 잠을 잘 못 잤다. 내향인이 내가 많은 부모임들 앞에서 아이들과 수업을 해내는 일은 상상 속에서도 진땀이 나는 그림이었다. 또 학예회 기간이 되면 더 고달 팠다. 영어 연극이라도 하겠다고 하면 대본 편집부터 음악까지 모두 담당 선생님인 내 몫이었다.
일을 하며 느낀 건 두가지 였다.
세상은 초보에게 관대하지 않다 .
거저 주는 돈은 없다.
하지만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은 곧 나를 자본주의의 노예로 만들었다.
그렇게 일을 시작한 지 1년 지났다. Don't cry 이슈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직장에서 일 년을 버틴 것이었다. 한해 스케줄을 다시 짜고 수업 나갈 원을 배정받는 기간이 되었다. 회사에서 내게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