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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

전업 주부 탈출

by 송주

얼마 전 아들이 말했다.

"엄만 어떻게 명품 가방 하나 없어? 나중에 내가 상견례하면 그때도 부직포 가방 들고 올 거야? 내가 취직하면 가방부터 사줄게"


남편과 나는 검소한 면이 닮아 있었다. 사치를 부리지 않았고 현실적으로 소비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나 저축이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저축도 했다. 할부는 빚이라 생각해 카드 할부를 하지 않았고 가용 금액 내에서 물건을 샀다. 하지만 가용금액은 늘 부족했다.


결혼 후 알게 된 사실

가난이 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창문으로 나간다.

꼭 가난이 아니더라도 돈이 없거나 부족한 현실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무색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래도 갈등 투성이인 결혼 생활에 돈 문제가 겹치니 전우애조차 창문으로 나갈 판이었다.

저축 유무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혼자 벌어 쓸 때는 크게 사치를 하지 않는 이상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월급으로도 충분했다.

결혼 후 아이가 둘 태어났고 외벌이라는 현실은 가정 내서 숱한 갈등을 낳았다. 남편의 어깨는 점점 무거워졌고 나는 허리띠를 졸라매다 허리가 없어질 지경이었다.

또 결혼 후 나가는 각양각색의 지출들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양가 부모님을 챙겨야 했고 양가 친척들을 챙겨야 했다. 식구가 늘어난 만큼 모든 지출이 늘어났다. 분양받은 아파트 대출금에 각종 세금들이 큰 부담임을 그전에는 알지 못했다. 부모님 슬하에서 한 모 씨의 딸로 살던 때는 몰랐던 경조사비가 꽤 많이 나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몇 해전 연이은 남편 지인의 부모상으로 경조사비가 100만 원이 나가는 달 있었다. 이번 달도 경조사비가 100만 원이 나갔다. 아 그러고 보니 가을이구나... 결혼식이 많아도 너무 많다.

예비비가 무일푼이었던 남편과 나에게 예측 불가한 지출은 큰 부담을 넘어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결혼 생활에서도 돈은 정말 중요했다.


오헨리의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 속 델라는 아끼던 머리카락을 팔아 짐의 시계줄을 샀다. 짐은 델라를 위해 아끼던 시계를 팔아 델라를 위한 빗을 샀다.

아마 이 둘도 소설 밖에서는 궁핍한 생활에 숱한 갈등을 겪었을 것이라 감히 추측한다.

버전 1: 델라와 짐은 크리스마스 케이크 값이 없어 신세 한탄을 하다 싸웠습니다.

버전 2: 짐이 판 시계는 금시계였다. 금값이 오르자 짐은 시계를 판 것을 후회하며 델라가 부잣집 딸이었음 어땠을까 생각했다.

버전 3: 델라는 담배를 피우는 짐에게 담뱃값 아끼면 내 빗 3개는 사겠다며 소리를 질렀다.


안 그래도 전업 주부의 삶이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갑갑해 미칠 지경이었는데 생활비까지 부족한 현실이 더해지니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둘째가 3살이 넘어갈 무렵 나는 하이에나처럼 일자리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그전처럼 학원에 취업하는 일은 퇴근 시간이 늦었기에 할 수 없었다. 나는 아이들 하원 시간에 맞춰 퇴근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아 헤맸다. 경력단절 아줌마가 참 따지는 것도 많았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일자리가 있었다.

근무시간 12시 ~4시

페이도 나쁘지 않았다.

나를 위한 맞춤 일 자리라 생각했다. 나는 바로 업체에 전화를 했고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 면접을 보러 갔다. 자신이 있었다. 그곳은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 수업을 할 수 있는 영어 강사를 교육하고 파견해 주는 회사였다. 세상이 변했고 유아 영어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감조차 없었다. 하지만 취업을 위한 작은 기대감으로 회사 문을 열고 걸어 들어갔다.

유아들을 상대로 한 영어라... Hello, How are you? 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유아 영어가 별게 있겠어하는 자만심에 경력단절 아줌마의 객기가 더해졌다. 열심히 하겠다는 포부를 우렁차게 밝히며 인터뷰를 마쳤다. 그리고 나는 바로 교육장으로 안내되었다.

이제 나도 직장인이 되는 건가? 돈 벌면 숨통 좀 틔이려나?


내가 처음 받은 교육은 영어 노래와 율동을 익히는 거였다. 신나는 음악이 교육장 안에 울려 퍼졌고 나는 그동안 집구석에 박혀 거지꼴로 지냈던 세월의 한을 털어 내듯 엉덩이를 연신 흔들어 댔다.

와우 카타르시스란 이런 것!

첫 교육의 내용은 너무 재미있기만 했다.


인생은 가끔 고스톱 판 같다. 재미와 월급을 다 잡은 일타 이피인 줄 알았는데 첫 끗발이 개 끗발이었다.(타자 아닙니다.)

교육을 들을수록 감이 잡혀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유창하진 않아도 영어 회화가 필요했다. 차라리 주어 동사를 가르치라 하소서... 회화에 능숙하지 않았던 나는 영어를 잘하시는 강사님들 틈에서 주눅이 들었다. 또 유아를 상대하는 수업은 처음이었기에 짧은 시간 안에 유아들을 집중시킬 스킬도 부족했다. 나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한 번도 빠짐없이 교육을 받았다.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으면 데리고 와 업고 있기도 했다. 결혼 전처럼 칠레레 팔렐레 살 수 없었다. 뭐든 안 하면 계속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3월이 다가오자 시연 수업을 테스트받기 시작했다. 성인 강사님 앞에서 원맨쇼란 이런 것인가 싶을 만큼 민망한 수업 테스트가 이어졌다. 또 지적이 이어졌다. 외향인의 탈을 쓴 내향인인 나는 그 시간이 너무 괴로웠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3월이 되었다.

떨리는 첫 수업이 잡혔다. 보통 유치원은 면접이나 시연 수업을 통해 영어 강사를 뽑는다. 하지만 나는 서툰 초보강사였기에 면접이 없는 작은 어린이집으로 수업을 나가게 되었다. 이런 경우 원장님들은 교육사를 믿고 강사를 파견받는다.

수업 날 아침 화장도 하고 처박아 놓은 유행 지난 원피스도 꺼내 입었다. 전날 밤 혼자 수업 연습을 해 보느라 늦게 자는 바람에 머리는 무거웠지만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더없는 만족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 가치를 인정받는 일은 돈이라 생각했다. 남편 눈치 안 보고 짜장면을 시켜 먹을 수 있는 플렉스만 생각했다.

첫 수업을 하고 나왔다.

곧 지사에서 바리바리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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