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무모한 용기의 시작

오미자 같던 연애

by 송주

그는 24살이었고 군대를 제대하고 학교에 돌아온 복학생이었다. 내가 야구를 좋아하는 그와 처음 조우 한 곳 역시 야구 동아리의 동아리 방에서였다. 야구를 광적으로 좋아하던 그는 다부진 체격의 청년이었고 숫기 없어 보였지만 강한 인상이었다. 이목구비가 반듯했고 피부가 매우 하얀데도 유하게 보이지 않는 강한 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강한 인상만큼 남자답기도 했다.

이목구비가 반듯했지만 잘 생겼다는 말은 아니고 그냥 반듯하게 눈 코 입이 제자리에 잘 붙어 있다는 말이다.

우리 5명은 동아리 회장이었던 그와 친하게 지냈다. 미셀과 사이가 나빠진 후 혼자 맘고생을 하던 나는 그와 따로 만나는 횟수가 친구들보다 많아졌다. 미셀의 사나운 태도를 견디기보다 그 편이 나았다.


어느 날 우리 둘은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그에게 내 상황을 털어놓고 고민 상담을 하고 싶었다. 누구라도 잡고 하소연하고 싶었던걸 수도 있다.

"이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그럼 아이스크림 하나 사 와봐."

"갑자기?


쭈쭈바를 그에게 건넸다. 꼭지를 따고 쭈쭈바 몇 입을 쭉쭉 빨아먹던 그가 내게 어떤 혜안을 제시해 줄지? 그의 말 한마디가 나를 이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을지?

곧 그가 먹던 쭈쭈바를 잠시 빼고 입을 열었다.

"어차피 링 속에 있는 건 너잖아. 네가 알아서 헤쳐나가야지.!

쭈쭈바 값 500원이 아까운 순간이었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묻냐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쭈쭈바 값과 함께 사라졌다.

그는 그 길로 버스를 타고 타 지역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끝없이 징징거리며 의지하고 싶어 하는 여자와

우는 건 딱 질색에 의지처를 내줄 마음이 없는 남자가 만났다.


달라서 끌린 건지

삼각관계에 지쳐 기댄 건지

어느 순간부터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들이 늘어났고 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좋아졌다. 생각해 보면 남녀는 붙어 있으면 자동으로 없던 감정도 생기는 것 같다. 그 감정은 맑은 물속에 파장이 일듯 나도 모르는 사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은은한 파장 역시 물속을 흐리기는 충분했다. 그냥 그가 다 좋았다.


나는 좋아하는 쫄면을 그 앞에서 먹을 수 없었다.

그 앞에서 빨간 쫄면 양념을 입가에 묻힐 바에는 한 여름 뜨거운 우동을 택하는 편이 나았다. 그런 내 마음을 대문자 T인 그가 알 리가 없었다.

"이 더운 날 우동을 먹겠다고?" 그는 갸우뚱하더니

쫄면을 시켜 맛있게 잘만 먹더라.


그렇게 몇 달 후 나는 그에게 고백을 했다.

"후회할 것 같아 말해요. 우리 사귀어요."


후회할 것 같아도 참아야 하는 말들이 세상에 많다.

소심한 지인의 이에 낀 고춧가루의 존재 알리기

-둘 다 민망 해 질 수도 있다.

기획 회의 중 '제가 해 보겠습니다.'

-곧 입을 원망하게 될 것이다.

새 옷 사서 자랑 중인 친구에게 그 옷 세일 중이라 말하기

-우정도 세일될 수 있다.


참지 못하고 괄약근을 비집고 나오는 무색유취의 그것처럼 우리 사귀어요를 내뱉은 후

나는 훗날 유구한 지팔지꼰의 역사 중 하나가 되었다.

(지팔지꼰: 자기 팔 자기가 꼬았다.)


훗날은 훗날이고

그때는 훗날을 모르니 그렇게 고백을 한 후 그는 내 남자 친구가 되었다. 같은 교양 수업을 듣고 같이 밥을 먹고 매일 그와 만났다.

1년 반 후 그가 뉴질랜드로 연수를 떠나게 되었다. 나는 눈물로 그를 배웅했고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게 전화를 했다. 그는 그렇게 어학 연수비 일부를 국제 전화에 썼다. 공 들여 키운 아들도, 막 키운 아들도 사랑 앞에서는 하찮게 돈을 쓴다. 그의 부모님이 아셨으면 복장을 몇 번 쳤을 것이다.

그가 귀국하는 날 나 역시 평생 처음으로 최대 일탈을 감행했다. 나는 김포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나는 부모님 몰래 비행기에 올랐고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편지라도 한 장 써 놓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활을 떠난 화살처럼 비행기는 빠구 없이 김포로 떠났다. 김포에서 다시 인천 공항으로 가는 공항버스에 몸을 실었다.

나의 무모한 용기는 그에게 한 고백을 시작으로 인청 공항 입국 게이트 앞에 나를 서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나왔다. 청바지에 회색 기본 면티를 입고 출국 게이트 밖으로 나오는 그가 아직도 선명한 이유를 모르겠다.

우리의 연애는 오미자 열매 같았다. 두근거리는 처음은 간장감에 시었고 달콤한 수많은 순간들도 많았다. 달달하기만 할 줄 알았던 사랑은 눈물, 콧물을 한 바가지씩 쏟아내게 만들며 쓰고, 맵고, 짜기도 했다. 쏟아낸 눈물, 콧물만큼이나 우리는 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20대의 많은 시간을 그와 함께 보냈고 오미자가 우러나듯 서서히 그와 많은 부분에서 어우러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다섯 가지 맛 외에 숨어 있는 한 가지 맛을 나는 알지 못했다.

그 맛은 예측 불가 맛이었다.

keyword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