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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처가 되긴 힘들었어

인생 쉬운 게 없다.

by 송주

나는 20대를 생각 없이 보내면서 그렇다 할 스펙을 쌓지 않은 채 취업문을 두드렸다. 근거 없는 자신감만으로 높은 취업문을 넘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그냥 편한 방법을 택했다. 나를 채용해 준 작은 보습 학원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프리랜서 강사였던 나는 늘 안정된 직장을 갈망했다. 갈망만 했기에 결국 나는 4대 보험을 가입해 주는 정년이 보장된 직업을 찾지 못했다.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았더니 미래도 없었다.

즐겁던 시절을 후회하냐고? 후회한다.


쭈쭈바를 사달라던 내 오래된 남자 친구는 번듯한 직장인이 되었고 내 남편으로 신분도 상승했다.

우리는 결혼이라는 배를 타고 긴 여행을 시작했다.


남편과 나는 태초부터 다른 종인 듯 맞지 않았다. 결혼 전 나는 나와는 다른 남편의 모습에 매력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다. 나약한 여자이고 싶었던 나는 보호받고 싶었다. 강한 사람에게 끌리는 이유는 생존 본능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아주 원초적인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자신만의 삶의 방식과 행복을 추구하는 내 또래를 X세대라 칭했다. 나 역시 힙합 바지에 큰 워커를 신고 다니며 자유와 개성을 중시하는 신세대 인 척 행동했다. 하지만 내 내면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듯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여전히 오래된 질서를 추구하며 현모양처를 꿈꿔 왔던 것 같다.


결혼은 사람을 바꾸고 동시에 나를 파악하는 통로였다.

나와 살림은 상극이었다. 설거지 빨래가 게임 속 미사일도 아니고 무한대로 생산 됐다. 누가 대신 해 줄 수 없는 집안일은 모두 내 몫이었다.

남편은 남자가 주방에 들어오면 소중이가 잘못된다는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 같았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면 누구나 한다는 다림질조차 자신은 못한다며 내게 맡겼다. 당연히 가사 분담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내게 살림은 매일 해야 하는 과제처럼 느껴졌기에 남편의 손이 간절했다. 하지만 남편은 아예 가사에는 문외한이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늘 팔을 걷어붙여 뭔가를 해야 하는 쪽은 내 쪽이었다.


이렇게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언제나 실망을 낳았고 나는 크산티페가 왜 악처가 되었는지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결국 나는 현모는 모르겠고 양처는 될 수 없는 몸이었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아이가 생겼다. 나는 출산을 두 달 앞두고 다니던 학원을 퇴사했다. 전업 주부가 내 직업란을 차지하게 되었다. 첫 아이를 만날 생각에 설레기도 두렵기도 했던 양가감정에 혼란스러웠지만 무사 출산만 기원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남편은 그때도 지금도 손에 뭔가를 사서 내게 무뚝뚝하게 내밀던 사람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지는 않았다.

배가 불러 있는 어느 날 남편의 퇴근 시간쯤 햄버거가 먹고 싶다며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왜 티브이에서 보면 임신한 아내가 한 겨울에 딸기가 먹고 싶다고 하면 남편은 옆 동네까지 수색하듯 뒤져가며 딸기를 사 오지 않는가? (요즈음은 사시사철 딸기가 있지만..)

하지만 퇴근한 남편의 손에는 햄버거가 없었다.


"네가 햄버거가 먹고 싶다고 했지 사 오라는 말은 안 했잖아!"


남편은 형님들에게 못 된 것만 결혼팁으로 배워 온 듯 힘의 우위를 점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 도발이 예상되는 순간 예측 불가한 방어 기제를 가동해 기선 제압을 시도했다.

예측이 안 되는 남편의 행동들 특히 내 기준에서 '미안해'가 나와야 하는 상황에 무조건 버럭을 시전 했다. 나는 무척 힘든 시간을 보냈다.

결혼 생활은 모든 것이 드라마가 아닌 실제 상황이었다. 남편은 화를 잘 내는 대신 그 화가 반나절 이상 지속되지는 않았다. 나는 그 틈을 하고 싶은 말을 남편에게 쏟아 내며 나름의 수동적 복수를 했다. 그러면서 가슴의 응어리를 해소하곤 했다.


주변 많은 부부들은 하나 같이 안 맞는 두 사람이 만난 것 같았다. 결국 결혼 후 안 참으면 이혼, 못 참으면 이혼이라는 말을 통감했다. 나는 일단 한 템포 참는 것을 택했다.


결혼 생활 동안 남편은 많이 달라졌다. 설거지도 하고 분리수거도 해 준다.


우리가 탄 배는 별무리 없이 앞으로 전진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배 안의 나는 이렇게 끝없이 인내했다. 우리는 결혼 전 수많은 다툼을 통해 서로가 다른 사람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랑, 연민, 애증, 가족애, 인류애 기타 등등을 한 스푼씩 담아 계속 나아갔다.

그 사이 나는 기대하고 기대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기대는 결국 내 자신이 나약하다는 증명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남편에게 향하던 기대나 시선을 거두고, 내 안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그리고 혼자 잘 살 수 있는 사람이 뭐든 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남편의 손길을 기다리기보다 내가 배우고 익혔다. 팔목이 좀 아파 그렇지 막힌 배수관을 분해 해서 뚫는 건 이제 일도 아니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나를 옥죄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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