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무슨 일이고
나는 가끔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이라는 말에 두려움을 느낀다.
물론 그 한 치 앞에 뜻밖의 행운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통 이 말은 예상치 못한 불행을 떠올릴 때 더 자주 쓰이니 괜히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있다.
지난 3월 테니스 강습 후 발생한 교통사고만 봐도 그렇다. 여느 때처럼 운동을 마치고 오는 길에 차가 폐차 될 정도로 큰 사고가 날거라 누가 생각했을까?
코 앞에 닥칠 일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한계라 생각하며 허무한 마음에 빠지기도 한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난 건 지난 10월 추석 무렵이었다. 그 당시 내 최대 고민은 무턱대고 시작한 브런치 연재를 이어 나갈 수 있을지 하는 것이었다. 특별할 건 없는 사소한 고민이었다. 이런 고민은 평생 해도 괜찮다. 처음 브런치에 입문한 후 연재 북 몇 편을 완성했지만 아는 게 병이라고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 편 발행을 한다 쳐도 성격상 이주 분량 그러니깐 두 편은 완성되어 있어야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에게는 브런치 매거진이 더 적합한 것 같다.
'물러서지 말고 뭐든 해 보라'고 독려하기 위해 무모한 1의 용기를 연재하게 되었다. 평범한 사람이지만 멈추지 않고 꾸준히 뭔가 이뤄 냈던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열 편의 책 소재를 찾을 수나 있을까 고민하던 때 삼촌의 연락.. 느낌이 왔다.
삼촌은 아빠의 8남매 중 다섯째이다. 내 할아버지는 허생전의 허생이 부인에게 바가지 긁히기 전 모습으로 평생을 살다 가셨다. 그러니 아빠의 형제들은 가난을 덤으로 물려받아 각자도생의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모두 타고난 근성으로 공부했고 번듯한 직업을 얻었고 가정을 이뤘다. 삼촌은 공무원이었다. 교사인 숙모와 결혼했고 아이도 낳았다.
그러던 중 한 20여 년 전이던가... 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었다. 삼촌은 시청을 나오셨고 사업을 시작하셨다. 그 사이 삼촌의 삶이 어땠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산전, 수전, 공중전의 곡예를 여러 번 넘지 않았을까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현재 삼촌은 6군데 가게를 가진 울산의 유명 돼지 갈빗집 대표이다. 가게 말고도 축산, 유통까지 겸하고 있는 작은 기업의 회장님이다.
부모님, 남편과 나는 추석 명절에 삼촌을 만났다. 약속 장소는 막 인테리어를 시작한 가게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엇을 하는 가게 인지 가늠할 수는 없었겠지만 나는 그곳이 무조건 갈빗집임을 알 수 있었다. 삼촌은 나를 불렀다. "송주야 여기에 화장실을 만들 거고 이곳은 주방이야. 사람이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큰 냉장고가 들어갈 거야. 잘 봐 둬."
머릿속이 하얘지다 검게 물드는 느낌이 들었다.
곧 닥쳐 올 미래 속 내 모습이 신랄하게 그려줬다.
고민하고 계산하고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내 모습이...
근처 횟집으로 자리를 옮긴 우리에게 삼촌은 이렇게 서두를 열었다. "내가 힘들 때 송주가 나한테 잘 지내냐고 안부 전화 한통씩 해 준 게 너무 고맙더라." 그랬다. 삼촌 주변의 복잡한 문제들에 관한 것은 나는 모른다. 단지 내 출생부터 지금까지 삼촌은 그저 내 삼촌이라는 것만 사실은 확실했기에 안부 전화는 동방예의지국 국민인 내게 별일도 아니었다.
곧 삼촌은 본격적으로 본론을 끄집어냈다. 갈빗집 6호점을 낼 예정이고 6호점이 내 가게가 되면 좋겠다고 했다. 나와 남편은 하던 일을 계속하고 가게 운영은 삼촌이 다 해 주신다고 했다. 그 운영에는 노무, 세무, 회계 기타 등등 모든 것이 포함된다. 그리고 투자금 보장이라는 초강수까지 두셨다.
살면서 장사나 사업을 아예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 학원을 내 볼까 한 적도 있었고 커피숍을 낸 지인을 보고 커피숍을 해 볼까 한 적도 있었다. 생각만 했지 실행해 옮길리는 당연히 없었다. 나는 사실 사업이라는 말만 들어도 길거리에 나앉는 생각을 먼저 하는 베짱이라고는 간장종지만큼도 없는 소시민이다. 불혹 중반이 되니 약한 몸은 더 약해져서 사업이니 장사는 고민 없이 고이 접어 다음 생으로 넘겼다. 평생 월급쟁이로 글 쓰며 쭉 사는 게 목표라면 목표가 되었다.
그런 내게 갈빗집 사장을 하라는 제안이 훅 들어왔다. 불현듯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에 들어왔다가 생각났다. 그녀는 예쁘기라도 했지~~ 갈빗집 장사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 이번 명절 마음 편히 보내기는 틀렸네." 생각했다.
그래 맞다. 삼촌이 깔아주는 판에 숟가락과 일부 돈 만 얻으면 됐다. 하지만 언제나 그 돈이 문제다. 가게에 손님은 없고 파리만 날린다면? 삼촌과 트러블이라도 생긴다면? 같이 뭔가 하면 장사가 잘 돼도 싸우고 안 돼도 싸운다던데..
또 사업에 능통한 삼촌이 모든 것을 관리해 준다 치더라 팔짱 끼고 지켜만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안 그래도 바쁜 인생이 더 바빠질 거라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왔다. 생각해 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한 후 깊은 고민에 빠졌다.
다음날 삼촌의 갈빗집 중 한 곳에 밥을 먹으러 갔다. 울산 달동점은 사촌동생이 온전히 받아 운영 중이고 우리 집과 제일 가까운 가게였다. 메뉴는 갈빗집답게 오직 양념 돼지갈비, 된장찌개, 냉면이 전부다. 물론 전에도 몇 번 먹어본 다 아는 맛이지만 이번에는 평가하듯 고심하며 먹어야 했다. 이븐 하게 양념이 뱄는지 사이드 메뉴는 맛있는지 기타 등등 요리 프로 심사 위원처럼 고기를 씹어 삼켰다. 역시 맛있었다.
다시 선택의 순간이 왔다. 나는 전부터 맛집은 산꼭대기에 있어도 찾아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가게 위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가게 규모가 아담한 것도, 단일 메뉴인 것도 마음에 들었다. 삼촌이 세팅해 주는 기회 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남편은 내년이면 50이고 나는 퇴직금 없는 프리랜서다.
나는 이렇게 가게를 할 이유들을 생각했다. 사람은 하고자 하는 일에는 수많은 이유를 찾게 된다. 삼촌이 깔아 주는 판에 베팅하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울산 미림 숯불갈비 무거점 사장이 되었다.
*류귀복 작가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자존심을 태평양에 던지고 책이나 글이 아닌 가게 홍보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