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지나간다.
사실 가스 냄새는 그 어디에서도 나지 않았다. 그건 내 마음속 불안이 뿜어 내는 경고였다. 내 불안은 증폭추라도 단 듯 점점 커져갔다. 하루 종일 입이 마르고 늘 긴장된 상태로 24시간을 보냈다. 면접 직전 기분으로 하루를 보낸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수도 있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자신감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외부의 모든 공격이 나에게 향하는 듯했다. 다 놓아 버리고 싶었다. 사회 복지사 실습은 함께 하던 하수진 선생님의 도움으로 겨우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지만 내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더 이상 직장을 다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 집어던지고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나는 원장님께 퇴사를 고했다. 메인 교사인 내가 학기 중에 무책임하게 사직서를 던졌다. 두 번 다시 일을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샘이 오죽 힘들었으면 이러겠어요? 이만큼 고생했는데 보험 하나는 있어야지. 3개월 쉬다 다시 와요."
원장님 말이 고맙게 느껴졌지만 내 미래를 확신할 수 없었던 터라 걱정이 앞섰다.
나는 유능한 강사도 유능한 사람도 아니었다. 자기 관리도 못하고 힘들어 그만두겠다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원장님은 그런 나를 끝까지 이해하고 배려하셨다. 훗날 나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후 원장님의 말을 마음속에 음각하며 살게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보험 같은 사람이 되어 줄 수 있길 희망했다.
모체의 산도를 지나 세상 밖으로 나온 신생아는 세상 떠나갈 듯 울음을 터뜨린다. 마치 태어나는 순간부터 살아가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하다. 남들만큼 살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더 큰 힘을 들여야 하는 것이 인생이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았지만 그때는 막다른 길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사람은 아프면 원인을 찾기 위해 자연스레 과거를 더듬는다. 그때의 선택과 상황을 후회하거나 탓하는 일이,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다.
‘나는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 걸까’ 생각하니 억울함이 밀려왔다. 인생이 애초에 공평함을 약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부, 육아, 남편, 일, 돈 모든 것을 탓하고 싶었다. 몸에 이상이 생기니 긍정 회로가 고장 난 듯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장 원망스럽던 건 그 상황을 감당해 내지 못했던 나 자신이었다.
집에 틀어 박혀 병원 치료를 병행했다. 엄마는 식욕을 잃은 나를 위해 늘 밥을 차렸다. 내가 식당의 매운 수제비가 먹고 싶다고 하면 엄마는 얼른 나갈 채비를 했다. 정작 엄마는 매운 음식을 전혀 못 먹는데도 말이다. 아기가 된 듯 엄마와 하루 종일 함께 하며 아침 연속극 와 저녁 연속극을 기다리는 일상이 반복 됐다. 뻔한 이야기가 그토록 재미있는지 예전에는 몰랐다.
엄마와 함께 차를 마시고 티브이를 보고 아이들을 돌보며 나이 든 딸은 또 그렇게 엄마에게 기댔고 엄마는 또 그렇게 어깨를 내주었다. 나는 건강을 점점 회복했고 3개월 후 원장님과 약속한 대로 복직했다.
무모하게 일을 벌이다 낭패를 보는 경우도 있다.
인생은 잘 나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도 하니 적당히 몸을 사려야 한다. 나는 몸도 마음도 정상의 궤도에서 벗어난 후 나는 잠시 멈췄다. 역량 밖의 욕심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때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나를 보호하는 장비가 될 수 있다.
집 근처 직장이 없어지며 앞날이 불투명했던 남편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부산 지사로 발령이 나며 위기를 모면했다.
남편은 울산에서 부산으로 출퇴근을 하며 수많은 상사와 직원들 사이에서 신입 사원처럼 힘들어했지만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다.
그리고 이년이 지나 우리는 새 집으로 이사를 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우려와는 반대로 집값은 수직 상승하며 그때 치렀던 프리미엄의 몇 배를 더 줘야 살 수 있을 만큼의 인기 아파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