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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에 하는 개육아 1
08화
오늘 산책은 애견 운동장이다
아쉽기만 한 매일의 산책
by
송주
Dec 1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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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늦게 시작하는 날 아침이면
애견 운동장으로 크림이를 태우고 차를 몬다. 잠옷에서 산책을 가는 후줄그레한 옷으로 환복 하는 그 순간을 크림인 놓치지 않는다.
기분이 좋아
앞 구르기
옆 구르기를 하며 뒹굴
면서
바닥 청소까지 해 주는 크림이를 잠시
화장대
위로 데려가 진정시킨다.
아이들이 어릴 때가
생각난다.
두 아들들이 천지 분간 못 하고 별나게 설쳐 댈 때면 으레 말 안 듣는 아이를 망태기 속에 넣어 잡아간다는 망태 할아버지를
소환하곤 했었다.
가상의 존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아이들을 진정시키곤 했던 철없는 엄마는 개를 진정시키는 방법으로 화장대를 택했다.
크림이가 망태할아버지를 알 리도 알아들을 리도 없기 때문이다
.
물리적으로 좁고 반려견 몸집 대비 조금 높은 장소는 방어 본능 때문인지 희한하게 얌전해 지곤 했기에
화장대에 잠시 크림이를 앉혀두고 빛의 속도로 나갈 채비를 마친다.
애견 슬링 속에 크림이를 넣고 어깨에 두른다.
큰 아이 작은 아이 23개월 터울로 낳고 키우느라
5년간 아기띠를 허리춤에 몸과 하나인 양 두르고 다녔는데 이제 이 나이에 개를 슬링에 넣고 매고 다니게 되었다.
4.7킬로그램..
안 그래도 좁고 처진 어깨가 아들들 매고 업고 다니느라 사라지고 없는 지경인데 크림이가 보태기를 하고 있다
.
어라..
근데 이 녀석 편한지 잠까지 잔다.
역시 꿀잠에는 엄마 품 만한 게 없구나.
애견 운동장은 집에서 차로 15분 거리이고 시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시설은 그다지 좋지 않지만 지역 구민이라면 단돈 천 원에 시간제한도 없이 이용할 수 있다.
무엇보다 좋은 건 이곳이라면 반려견들이 목줄 없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다는
것이다.
애견 운동장 입구부터 전력질주 하는 내 반려견
이곳에도 나처럼 오전의 이른 시간에 오는 개들과 견주들이 있다.
사실 이들은 나처럼 이라기보다 나보다 훨씬 일찍 반려견과 함께 하루를 시작한다.
강아지를 데리고 아주 이른 아침부터 산책이라는 숙제를 하고 있는 이들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지만 오전 시간 일부를 수시로 함께 하다 보니 어느새 삶은 계란을 같이 까먹고 수다 떠는 사이가 되었다.
그들과 나는 반려견을 키우고 규칙적으로 산책을 나오는 사람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드레스 코드를 맞춘 것도 아닌데 모두 한결같이 후줄근한 패션으로 개들이 입고 있는 옷이 나나 그들의 옷 보다 더 좋아 보인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개 산책을 나오면서 한껏 멋 부릴 이유도 없으니 다들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본인들의 바쁜 오전 시간 일부를 반려견을 위해 기꺼이 할애하는
그들은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도 본인들이 책임져야 할 한 생명을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애견 운동장에서 크림이가 뜀박질을 하며 친구들의 엉덩이 냄새를 맡고 싸돌아 다닌지 한 시간 정도 지났다.
난 마음이 급해진다. 출근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가지고 온 짐을 챙겨 '크림아 집에 가자'를 외치지만 소리 없는 아우성인 양 크림인 반응이 없다.
결국 내가 먼저 출입문으로 걸어 나가며 크림이가 자석처럼 붙어 오기를 유도한다. 이 방법은 먹힐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만약 이 방법이 실패한다면 진짜 문을 열고 나가는 연기를 해야 한다.
그제야 크림인 내가 가는 줄 알고 놀래서 나를 따른다.
크림이와
함께 하는 애견 운동장은 들어가는 문턱은 한 없이 낮지만 나올 땐 생쇼를 해야 하는 곳이다.
더 놀고
싶은 크림이는 가련한 눈빛으로 사람 마음을 후비지만 더 놀 궁리를 하는 게 부질없는 일이라는 걸 아는지 이내 포기하고 턱을 차시트에 대고 눕는다.
생업도 개육아도 사람육아도 병행해야 하는 진격의 40대인 난 그렇게 아침 일찍 아쉽기만 한 산책 숙제를 마치고
출근길에
오른다.
더 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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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견
산책
개
Brunch Book
불혹에 하는 개육아 1
06
이건 반칙
07
개 **에 대한 짧은 소견
08
오늘 산책은 애견 운동장이다
09
바람이 문제다 난 죄가 없다
10
그저 그렇게 있다
불혹에 하는 개육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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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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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며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쓰다 보면 길이 생길 것을 믿습니다. 세상 모든 개를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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