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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즈 May 14. 2022

어지러워요.

아이들은 방학이고 남편은 춘절 휴일을 맞았다.

2주의 방학이 그저 즐거운 아이들은 근처 어디라도 여행을 가자 조르는데 차마 병원에 다녀온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머리가 복잡했지만 마음을 다잡아 보았다.


이미 머릿속에는 암 확진부터 전이가 됐을 가능성까지 시나리오를 썼다 고치기를 여러 번이었다. 반대로 양성 진단을 받고 그럼 그렇지 하고 웃고 넘기는 시나리오 역시 있었다.

어떤 극본이 내 미래가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아무 결과가 나온 것도 없는데 벌써 세상 끝난 것처럼 지내지는 말자.

혹시라도 내가 암이라면, 어쩌면 이곳에서 보내는 마지막 휴일일지도 모르는데 아이들에게 이렇게 기운 없는 모습만 보여주기에는 너무 미안하잖아…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은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뿐 아니라 흘러가는 시간에도 해당된다.

당장 오늘내일만 보면 불안하고 걱정이 돼서 미칠 것 같은데 몇 년이 지나 뒤돌아보면 이 시간이 너무도 그리울지도 모를 일이다.


급하게 근처 호텔을 예약해서 아이들 좋아하는 물놀이도 실컷 하고, 지난번 방문 때는 부담스러운 가격 탓에 먹지 못한 저녁 뷔페도 예약했다.

아이들은 "엄마, 여기 비싼 곳 아냐? 정말 가는 거야?"라며 몇 번을 물었다.

다른 데 가도 된다는 아이들을 보며 이런 생각도 할 만큼 컸구나 싶어 마음이 짠했다.


테이블 바로 앞에서는 밴드가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며 귀에 익은 팝송을 불러주기도 하고 바이올린을 켜기도 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공연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나도 잠깐은 아무 걱정 없는 사람처럼 잊었다.

스페셜 메뉴로 제공된 거위 간을 돼지고기인 줄 알고 먹었다 남편과 동시에 표정관리에 실패해 헛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즐겼어야 했는데 어색함을 그렇게 들켜버린 것 같았다.


순간순간 한숨짓는 나를 느꼈는지 남편은 "~찮아! 아닐 거야~ 편히 맛있게 먹어!"라고 확신에 차서 이야기했다.

무한대로 제공되는 맥주를 마시라며 갖다 주던 남편,  한잔도 마음이 편치 않으니 시원하게 꿀꺽꿀꺽 마시지는 못했지만 남편마저 나처럼 마음 졸이며 큰일  것처럼 했다면 아마 나는  비싼 돈을 내고서   모금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조직검사 날이 다가왔다.

마스크를 쓰고 조직검사실 앞에 앉아 내 이름이 불릴 때까지 30분 정도 기다렸다.

혼자 다녀올 수 있다고 큰소리는 쳤지만 자신감만큼 몸은 따라주지 않았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내 심장소리를 옆사람에게 들킬까 봐 의자에 앉아 머리를 기대어 눈을 감고 심호흡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드디어 내 이름이 불렸다.

흰색이었나 회백색이었나 차가운 벽안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베드, 그 옆에 위치한 초음파 화면, 내 갑상선을 검사해줄 담당자와 그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

모든 게 낯설기만 했다.

간호사가 겉옷을 벗고 속옷만 입은  누우라 했다. 탈의할 공간도, 갈아입을 가운도 없었다.

"여기서요?"라고 묻는 내가 오히려 이상하게 보이는 곳이었다.

탈의의 문제가 아니라 환자를 배려하는 인식 자체가 아직 자리잡지 않은 것 같았다.

기대하지 말자.

 년의 중국 생활 경험으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벗기 쉬운 셔츠를 입고 그 안에 브라 러닝을 입고 갔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벗은 셔츠로 배 위를 덮고 침대에 누웠다.

잠시 후 하얀색 천이 내 목 주위에 올려졌고 약품들과 검사 도구 부딪히는 소리들이 차갑게 들렸고 나는 눈을 꼭 감았다.

마취하겠다는 말과 함께 목이 따끔하더니 검사가 시작되었고 주삿바늘이 목을 마구 찌르기 시작했다.

코로 조금씩 숨을 쉬다 보니 답답해졌고 침도 삼키고 싶었다. 너무 깊숙이 찌르는 느낌이 불편해서 “으..”소리를 내고 말았다.

다행히 그즈음에 검사는 끝났다.

끝난  같은데 왜 아무말이 없지? 무서워 움직이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며 "움직여도 되요?" 물으니 끝났다는 답이 돌아왔다. 가장 먼저 침을 꿀꺽 삼켰다.

검사는 10분 남짓,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검사 부위가 완전히 지혈이 될 때까지 복도 의자에 앉아 기다려야 했다.


왼손으로 검사부위를  누르며 앉아있는데 다리 위에 올려진 오른손등에 손톱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긴장해서 나도 모르게 두 손을 얼마나 꽉 쥐었던지 남은 손톱자국이 긴장감을 그대로 말해주었다.



통역을 해주시는 분이 있다 해도 정확한 의사 전달이 되지 않는 곳에서 하루아침에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자체만으로 부담이 컸다.

괜찮을 거라 다독였지만 괜찮지 않았고, 타국에서 혼자 검사받고 있는 내가 갑자기 짠해졌다.

무서웠다. 그리고 서글펐다.

아무 말 없이 있는 내가 이상했는지 옆에 앉은 중국 아줌마가 자꾸만 말을 걸었다.

넌 검사가 왜 이렇게 빨리 끝났니, 너도 갑상선 검사했니? 묻는데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중국어도 잘 못하는데 복도에 꽉 채워진 중국인 사이에서 외국인이 검사 와서 겁먹고 있는 모습으로 시선을 끄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하... 그런데 세상사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

손톱자국을 보고 울컥한 그때부터였을까.

긴장이 풀린 탓인지, 긴장을 풀기 위해 심호흡을 많이 해서 과호흡이 온 건지 어지럽기 시작했다.

정신 차리려고 머리를 흔들어봤지만 소용없었다. 계속 말을 걸던 중국 아줌마가 "괜찮니?" 하고 물었다.

온몸에 땀이 솟구치는데 몸은 차가워지고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다.


“저 어지러워 못 앉아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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