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내 품은 점점 넓어지나 보다.
새로운 일상이다. 또 다른 일과가 생겼다.
나의 일과는 일어나자마자 고양이 밥을 챙겨주는 일부터 시작한다. 정확히는 배고프다고 냥;냥 거리며 내 머리 주윌 맴도는 녀석 때문에 늦잠을 잘 수도 없다.
퇴근 후에는 낮에 남겨놓은 녀석의 배변 덩어리를 치우는 또 다른 일과가 시작된다. 안 그래도 팍팍한 삶에 더 많은 루틴이 들어온 것이다.
잠들기 전에는 더 이상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잘 수 없다. 머리 주위에서 ‘골골송’을 서라운드로 울어대는 소리에 노래는 들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새로운 일상과 또 다른 세계가 열린 느낌이다.
이상하게도 이런 생각을 할 때 기억 속에 한 장면이 불현듯 스쳐간다
아이를 낳아 기르기 전까지 부모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젊은 시절 식당에서 소란스러운 아이들의 부모 얼굴을 아래위로 쳐다보기도 했다.
특히 오래전 한 장면에 내 기억이 멈춰있다. 지금의 아내인 그 당시 여자 친구와 함께 간 조용한 카페에서 있을 때였다.
돌쟁이로 보이는 아이 주위에 여러 명의 어른들이 있었다. 아이는 큰 소리로 울기도 하고 까르르 웃기도 했지만, 주위의 분들은 더 큰소리로 아이를 보며 웃고 즐거워하던 상황이었다. 나는 그분들에게 눈빛으로 불편하다는 신호를 보낸 적이 있었다. 아이의 할머니처럼 보이던 분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내 날카로운 표정과 몇 번을 마주쳤다.
아이를 키우며 그분의 표정과 그 상황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그때의 내 박한 이해심에 죄책감이 들고, 지나고 보니 나도 그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해를 내심 바랬기 때문일 것이다.
수년 후 더하면 더 했지, 결코 덜 하진 않은 아이가 나에게 왔다
그 아이만큼 아니면 더한 아이가, 더 이해심이 없는 나에게, 둘 씩이나 왔다.
사실 동물병원에서 사람보다 더 애처롭게 동물들을 안고 있는 보호자들이 아직까지도 이상하게 보이기도 한다. 유튜브에서 알고리즘이 찾아주는 영상 중에는 자신의 애완동물에게 ‘아빠가... 엄마가..’라고 말을 시작하면서 다정하게 타이르는 경우가 있는데, 아직까지 솔직히 이해가 잘 안 되는 때도 있다.
사람이 그 동물의 아빠, 엄마 라니.
내가 저들을 더 이해할 수 있을까
내 그릇은 아직 여기까지 일 것 같은데.
그래도 나는 음악 대신 그 골골거리는 털이불을 기다리며 오늘도 잠을 청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오래전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봤던 그분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잠시 갖는다.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접하게 되면서, 새로운 경험은 나를 또 다른 세계로 인도한다.
그리고 그 세계는 나를 다른 차원의 인내심과 이해심의 부피와 밀도를 갖게 한다.
그렇게 내 품은 점점 넓어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