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된 발바닥의 세계
대학에 합격했을 때, 나는 고향을 떠나 서울이라는 넓은 곳에서 새롭게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기대에 마냥 부풀어 올랐다. 힘든 수험생활 동안, 부모님의 간섭도, 잔소리 아닌 잔소리도, 어린 마음에는 나를 지치게 하는 것 중의 일부였다.
잘 모르겠지만, 그냥 갑갑하고,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2월 대학 입학 전, 나는 친구와 학교 근처의 하숙집을 구해서 미리 작은 이사를 하게 됐다.
입학식 날, 어머니는 지방에서 홀로 아침 일찍 서울에 오셨다. 어머니는 며칠 일찍 간단한 짐을 싸서 서울에 떠나보낸 아들도 보고 입학도 축하해 주실 생각이셨다.
요즘과는 조금 다르게 그 당시 시골의 부모님들은 자식의 대학 입학식을 직접 오시기도 하셨으니까.
그리고 그날, 어머니와 나는 ‘대학’의 입학식이란 것이 중고등학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가 있었다.
입학식 행사를 마친 후, 나는 단과대학 학생회를 통해서 신입생들의 수강신청을 위해서 어느 강의실로 모이라는 안내를 받았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난 한 친구가 말했다.
“선배들이 수강신청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우리 과는 어느 어느 강의실로 모이래.”
(그 당시에는 대학 수강신청을 요즘처럼 웹(Web) 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두꺼운 수강과목 책자를 보면서 종이 신청서 양식에 작성하는 형태로 이루어졌기에, 이런 과정들이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학과의 부학생회장이었던 선배가 나에게 같이 가자고 말을 했다.
“엄마, 학과 선배들이 모이래, 이제 학과로 가야 하나 봐.”라고 이야기했을 때,
어머니는 두 눈에 눈물을 닦고 계셨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이미 많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알았어." 어머니의 흐느낌 속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깜짝 놀라 당황스러웠던 것은 나도, 그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에이, 엄마 왜 그래. 우시고.”라고 어깨를 감싸 안아드렸지만, 어머니의 흐느낌은 더 크게 들려왔다. 어머니의 눈물은 그 자리를 떠나실 때까지도 그치지 않으셨다.
그렇게 어머니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나는 강의실로 향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어머니는 그날 외지로 떠나 생활하게 될 막내아들에게 따뜻한 밥이라도 사주시고 싶으셨지만, 그렇게 나를 보내야 했던 게 못내 서운하셨다고 말씀해주셨다.
나는 너무 떠나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정작 그게 서운하셨던 것이다.
그날, 어머니의 눈에는 열아홉 해 동안 나를 낳고, 키우신 추억과 노고가 단숨에 휘몰아쳐 왔을 것이다.
작디작은 입을 오물거리고, 아장거리던 아기였던 아들이, 어느새 커서 품에서 떠난다 생각하니 많은 감정들이 북받쳤을 것이다. 학교에 다녀오면 있었던 온갖 일들을 재잘거리면서, 엄마가 회사에 출근하지 않는 날이 제일 좋다면서 숨을 헐떡거리면 달려오던 그 아이가 힘든 우여곡절을 거쳐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구나. 그리고 어느새 낡은 둥지를 벗어나려 날갯짓을 하고 있다고.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가 아직 안되어 있는데, 그 아들은 그 속도 모르고 경쾌하고 서운한 날갯짓을 하는구나. 하며 흐르는 눈물을 닦으셨을 것이다.
새벽부터 따뜻한 밥이라도 사주시겠다고 오시는 어머니를 제대로 배웅하지 못한 철딱서니 아들은 이제야 그 기억을 끄집어내어 어머니의 마음을 읽어본다.
스무 해도 넘게 지나버린 지금, 나는 다시 고향이, 고향집이, 그리고 아직도 젊으셨던 어머니가 그립다.
그땐 왜인지 그렇게 떠나고 싶었지만.
고향의 집. 떠나야 다시 돌아올 수, 그리워할 수 있다.
... 자리가 파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의 머릿속에는 엉뚱하게도 거머리가 떠올랐다. 거머리처럼 몸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고향의 말. 가족의 말. 사무치게 그립기도 하고 끔찍하게 진절머리가 나기도 하는 유년의 세계. 발바닥의 세계.
그 세계를 떠나기 위해, 떠났다가 돌아오기 위해, 돌아와 그 빛과 그늘을 함께 내 것을 끌어안기 위해, 문학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닐는지....
나에게는 나의 문학이, 당신에게는 당신의 문학이.
<신해욱, 일인용 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