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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귀촌 10년, 자기소개 시간입니다

벼농사로 돈벌면서 딴짓하는 업글인간

2022년 여름.

도서관에서 운영는 독서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첫날 각자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진천에 온 지 10년 되었고 남편과 벼농사를 지으며 활동가로 활동하면서 아들 둘을 키우고 있습니다. 10년이 정말 폭풍 같이 지나간 것 같아요."


내가 말하고도 스스로 많이 놀랐다. '폭풍 같은 10년' 나의 지나간 인생을 이렇게 표현한 것은 처음이었다. 독서치료라는 프로그램 이름 때문에 치료를 받으러 왔다는 기분이 들어서일까.


그동안 무난하게 잘 적응해서 물 흘러가듯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결혼 후 180도 바뀐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동안 나도 모르게 참 많이 힘들었나 보다. '폭풍'이란 한 마디가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며 내 마음이 읽힌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괜히 눈시울이 뜨거웠다.



어렸을 적 나는
꿈도 많고 상상력이 풍부했다.

나는 만화를 참 좋아했다. 상상놀이도 좋아했다. 상상의 주제는 내가 만화 속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밤에 잠이 안 와도 상상놀이를 하려고 일찌감치 누워 여러 가지 상상을 하며 잠들곤 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만화책을 열심히 읽었다. TV 만화를 좋아했고, 만화책을 좋아했고, 만화 그리기를 좋아했다. 상상력을 발휘하는 건 다 재밌었다.


중학생 때, 공부를 참 안 했다. 엄마는, "그래서 인문계 고등학교에는 가겠냐?"라고 자주 걱정하셨다. 공부를 참 잘했던 언니가 있어서 공부에 더 흥미를 못 느꼈다. 노력해도 언니보다 못하고, 비교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공부머리가 조금은 있었는지 인문계 고등학교에 무사히 들어갔다.


2가 되어서야 공부해야겠다고 맘먹었다. 대학교는 가고 싶었나 보다. 뒤늦게 노력한 만큼 수능시험도 그럭저럭 잘 봤다. 자기 주도 학습 효과를 톡톡히 보며 내 인생의 첫 번째 교훈을 얻었다. 맘먹고 하면 못 할 것이 없다.



적당히 좋은 성적 적당히 좋은 대학

고3 때 국어 선생님이었던 담임선생님이 우연히 나의 과제물을 보고 글 속에 재치가 있다며 방송작가 하면 잘할 것 같다고 칭찬해주셨다. 그때 방송작가라는 직업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사실 만화가 좋아서 만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실력이 안 되었다. 좀 더 현실적인 선택으로 신문방송학과로 들어갔다. TV가 좋아서 방송국에 가고 싶었던 게 솔직한 마음이지만 고3 담임선생님의 말씀이 최종 선택에 확신을 갖게 해 주었다. 그렇게 나는 적당히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적당히 괜찮은 대학교를 갔다.



적당한 회사에 취직했다

신문방송학과에 가면 다 방송국으로 취업할 줄 알았는데 대학교에서 신문도, 방송도 제대로 우지 못했다. 그나마 관심 있게 배운 광고 마케팅을 활용하여 작은 회사의 마케팅팀에 지원하였고 덜컥 합격하였다.


통근시간이 하루 3시간 넘게 걸리는 곳이었다. 멀어서 힘들 것 같았지만 막상 다른 대안이 없었다. 마케팅 일은 배우고 싶었고,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다. 무엇보다 돈을 벌고 싶었다. 부모님께 경제적으로 도움을 드리고 싶었다.


어렸을 적부터 돈 욕심이 많고 알뜰했다. 어린이집 다닐 때부터 통장에 돈 모으는 재미를 알았다. 취업난이 심했는데 취직을 했다. 돈을 받고 일을 할 수 있어 마냥 기뻤다.


첫 월급은 110만 원. 3개월 수습기간 끝나고 130만 원을 받았다. '조금 더 다녀보고 이직하자.' 맘먹었는데 만 5년을 근무했다. 마케팅 초창기 멤버로 시작해서 제품이 인기를 얻었고 인지도가 올라가고 회사가 커졌다. 처음 연봉의 3배 정도 받을 때 결혼을 핑계로 퇴사했다. 5년 동안 회사에서 있으면서 여러 부서로 옮겨 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참 좋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가끔 회사 다니던 악몽을 꾼다.  




결혼과 동시에 아주 많은 것이 달라졌다.

회사생활 중 지인의 소개를 받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같은 지역에서 근무하던 남편은 연애 한 달만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여기까지가 인연인가 보다 했는데 커플링을 사들고 부산에 돌아왔다. 그렇게 부산-진천을 오가며 3년 넘게 연애하고 우리는 결혼을 했다.


결혼과 동시에 회사를 관뒀다.

평생 살던 부산을 떠났다.

평생 함께 살던 부모님 곁을 떠났다.


사실 회사 관두고 싶어서 결혼을 서두른 것 같다. 독립할 기회가 없었는데 결혼을 핑계로 독립을 했다. 부모님은 섭섭해하셨지만 솔직히 뒤늦게 성인이 된 '자유'를 꿈꾸며 조금 신났다.



시어머님과 함께 살기로 했다

충북 진천군. 부산에서 느끼는 이곳은 농촌, 시골. 남편을 만나기 전엔 들어 본 적도 없는 지역으로 이주했다. 남편의 고향이다. 아는 사람이라곤 남편이랑 시어머님뿐이었다.


연애 중에 시아버님이 병세 악화로 돌아가셨다. 우리의 결혼이 확정시될 때부터 시어머님과 함께 살기로 맘먹었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남편이 초6부터 살던 집을 수리 새집 같은 곳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부모님께 독립했는데 자유를 만끽할 틈도 없이 시어머님과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고부갈등은 생각보다 없었지만 함께 사는 생활에 불편함이 없을 수는 없. 친정 부모도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면 불편하다. 친정 부모랑도 싸우며 산다. 하물며 시어머님이 불편한 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히려 맘은 편했다. 부모님과 30년간 같이 살아온 내공 덕분이다. 자유를 꿈꾸고 결혼을 했지만 자유는 없었다. 어쩌면 참 다행이다. 독립이나 자취생활의 추억이 없어서.


     


담장 없는 감옥

혼자 마트라도 가려면 1시간쯤 간격으로 오는 버스를 타고 30분쯤 나가야 한다. 결혼 전엔 집 앞에 마트 편의점 넘치던 곳에 살았다. 지하철, 버스가 흔하던 동네에서 살았다. 결혼 후 나는 발목이 딱 잡힌 기분이 들었다. 마치 담장 없는 감옥처럼 느껴졌다.


남편 없이 밖에 나가기가 꺼려지고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인터넷이 되는 집에 있는 것이 제일 마음 편하고 재밌었다. 취미생활이 미드 보기와 블로그 활동인 내향형 인간인 덕분에 답답함이 자유인 줄 알고 반년을 버텼다.    



벼농사? 자식농사!

연애시절에도 농사철이 되면 바쁜 남편을 만나러 진천에 놀러 와 논에 따라다녔다. 철없게도 그땐 모든 게 다 재밌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결혼 전엔 재밌어 보이던 일이 결혼 후 본격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우리의 '일'이 되었다. 잠깐 도와주고 도망가면 그만인 재밌는 경험이 아니라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직업'이 되었다.


아무것도 몰라서 용감했다. 농사는 생각보다 고단하고 힘든 일이었다. 결혼하고 그동안 남편 혼자서 고생이 많았겠구나 싶었다. 남편의 일을 빨리 돕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콩깍지가 덜 벗겨져서 그랬다. 


"그래, 이제 우리 같이 힘 내보자!" 했는데...  첫가을 추수가 끝나고 신혼생활 반년만에 임신을 했다. 신혼생활을 더 길어질 줄 알았는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아이가 찾아왔다. 임신 사실을 알고 남편은 신이 나서 소리 지르고 뛰어다녔고 나는 펑펑 울었다. 억울했다. 뭐 하나 제대로 신나게 살아보지도 못했는데. 독립도 자유도 누려보지 못하고 내 인생은 이걸로 끝났구나 싶었다. 진짜 막막했다.




임신-출산-육아 과정을 2번 경험하고 나니 5년이 지났다.

정말 폭풍 같았던 5년. 나는 경력단절녀로, 주부로, 엄마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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