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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생활 10년, 싸우면서 친해지는 부부

벼농사로 돈벌면서 딴짓하는 업글인간

갑인 남편과 부산-진천 장거리 오가며 3년 넘게 애하고 결혼을 했다. 남편을 만나기 전에 장거리 연애는 무조건 끝이 안 좋다고 생각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사람 나름인가 보다. 우리는 잘 만났고 잘 결혼했다.



장거리 연애 3년 반

연애 시작 한 달 만에 남편은 고향으로 내려갔다. 남편이 고향에서 롭게 직장생활하던 중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예전부터 건강이 안 좋으셨는데 병세가 악화된 게 원인이었다. 대농이셨던 아버님의 벼농사를 남편이 이어받았다. 땅대출, 농기계대출, 주택대출이 고금리로 잡혀 있었다. 당장 다 팔아서 처분하면 대출은 사라지겠지만 그동안 아버님이 고생하신 보람은 남는 게 없어진다. 그렇게 남편은 농사를 이어받았야만 했다. 지금 농사량의 3배 정도 많았다. 생각해보면 장거리연애에 직장생활에 농사까지 남편이 참 힘들었을 것 같다.


나는 건어물녀 소리 들을 만큼 집순이였다. 회사-집만 오고 가는 게 전부였고, 취미생활은 집에서 미드보기였다. 남자친구를 자주 만나지 못해 아쉬웠지만 한편으론 다행이었다. 그래서 떨어져 있을 땐 각자의 삶에 충실했고 오랜만에 만나면 더 애틋하고 좋았다. 콩깍지가 단단히 쓰여 있을 때라 가능했다.


직장이 멀어 매일 출퇴근시간 도합 3시간. 젊었지만 고단했다. 회사가 커지면서 내가 맡았던 일들이 서울로 대부분 이전하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인사이동과 잦은 출장으로 힘든 시기였다. 돈 버는 것도 좋지만 탈출하고 싶었다. 부모님과도 너무 오래 함께 지냈다고 생각했다. 결혼을 하면 부산 떠나 독립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30살 결혼을 했다.

부산에서 차로 4시간 거리인 충북 진천. 남편 하나 믿고 올라왔다. 30년 평생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좋은 점도 많았지만 불편한 점도 많았다. 한 번은 부모님 곁을 나 독립고 싶었는데, 그게 결혼이 되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부모님 곁을 떠난 경험. 섭섭하면서도 신나는 모험 같은 경험. 시어머님과 함께 시작한 신혼생활. 이게 자유? 독립?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30년 만에 부모님과 처음 분리되는 경험을 했다. 돌이켜보면 어렸을 적부터 애착 문제인지 유달리 분리불안이 심했다. 그걸 30년 만에 극복할 수 있었다.


콩깍지가 벗겨지기 전이라 뭘 해도 재밌고 좋았다. 하지만 알콩달콩 신나는 신혼도 잠시. 첫째 아이가 계획 없이 덜컥 임신됐다. 몸이 무거워지고 예민해지고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남편과 자주 다투게 되었다.


평균 두 달에 1번 정도 친정에 갈 수 있었다. 멀어서 어쩔 수 없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독립하고 싶을 땐 언제고 막상 결혼하고 나니 친정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농사철로 바쁠 때나 안 바쁠 때나 매주말에 집으로 시누들과 시댁 식구들이 번갈아 왔다. 왁자지껄 대가족이 모여 먹고 마시고 하는 분위기는 참 좋았지만 한편으론 버거웠다. 가깝게 살면서 친정에 자주 오는 시누들이 부럽기도 했다. 친정에 가고 싶어도 맘대로 갈 수 없는 것이 슬펐다. 딸네 집에 놀러 오고 싶어도 맘 편히 못 오는 부모님을 생각하니 속상했다.     

 


내 편? 남 편!

신혼 초 외롭고 힘들 때마다 내 편이라 생각한 남편에게 툴툴거렸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바꿔줄 수 없는 남편은 '미안하다'라고 했지만 반복되는 나의 툴툴거림에 ‘나보고 어쩌라고’로 바뀌었다. 내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섭섭했다. 말다툼이 곧 싸움이 되었다. 속상한 마음을 나눌 사람이 진천엔 남편 밖에 없는데. 참 외로웠다. '남편한텐 말 안 해야지' 했지만 습관처럼 남편에게 툴툴거리다 다시 싸움이 되곤 했다. 남편은 '남의 편'이란 말이 참 와닿았었다.


싸워도 맘이 편하지 않았다. 남편은 싸우고 출근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난 또 시어머님과 하루 종일 함께 지내야 한다. 싸운 티를 낼 수도 없고 친정으로 도망갈 수도 없다.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했다. 그때 가장 큰 고민은 '안 싸우고 살 수 없을까?'였다.



싸우면서 정들었다

출산 후 더 자주 싸우게 되었다. 여전히 "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어!" 하며 서로 힘들다고 짜증내기 바빴다. 직장생활에 주말은 농사일로 바빴던 남편은 육아를 신경 쓰고 도울 여유가 별로 없었다. 안다. 알면서도 섭섭했다. 남편이 퇴근 후 아이 목욕도 시키고 놀아주려고 노력했지만 나의 성에 차지 않았다. 모유수유를 해서 남편이 밤에 도와줄 일도 없었다. 새벽에 아기가 울어도 남편은 코 골며 잠을 참 잤다. 새벽에 서러워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남편이 잘못한 건 없는데 세상에서 젤 미웠던 시기였다.


나는 아이 둘 키우며 5년 동안 통잠을 자보지 못했다. 늘 피곤하고 예민했다. 말 안 통하는 아들 둘을 키우며 체력의 한계,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평정심이 무너질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짜증과 화가 났고 말이 날카로워졌고 자동으로 부부싸움의 불씨가 되었다. 결혼 후 출산 육아까지 5년 동안은 참 많이 싸운 것 같다. 


싸울 땐 꼴도 보기 싫었는데, 화해하는 날은 남편을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싸울 땐 정이 -200%쯤 떨어지고 화해할 땐 정이 +300%쯤 쌓였다. 남은 100%로 다음에 싸울 때까지 사이좋게 지낸다. 그렇게 싸우면서 컸다.



책을 읽고 달라졌다.

도서관에 다니기 시작하고 책을 만났다. 남편, 육아, 삶의 고민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고민의 답을 찾겠다는 목표가 있었기에 독서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책 속에서 찾은 문장들은 마음속에 울림을 주었다. 이런 울림들은 여러 가지 생각을 낳았다. 화가 날 때, 어떻게 해소하면 좋을까 고민해 보았다. 상대방은 내 말에 왜 화를 낼까 생각해 보았다.


속상한 마음은 비우는 연습을 했다. 되도록 싸울 일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했고 싸우고 난 다음 화해하는 법을 연습했다. 내가 받고 싶은 대접을 남편도 기대한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남편도 듣고 싶어 한다. 내가 듣기 싫은 말과 행동은 남편도 싫어한다. 깨달았고 배운 건 써먹었다. 연습했고 반복했다. 내 마음이 편해지고 나니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고 배려할 여유가 생겼다. "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어!"에서 "나도 힘들지만, 너도 참 힘들었겠다."가 되니 싸움이 줄어들었다.


연애 3년, 결혼 10년. 깨달음을 얻었으나 가끔 아직도 싸운다. 1년에 1번 정도. 대체로 아주 유치한 말다툼이다. 예전보단 횟수나 강도가 많이 줄었다. 대신 화해도 빨리 한다. 오래 싸워서 좋을게 하나 없다는 걸 서로 잘 알고 있다. 때론 웬수 같고, 때론 아들 같고, 또 때론 남자친구 같은 남편. 아직 60년은 더 데리고 살아야 하는 내 짝꿍. 잘 데리고 살려면 사이좋게 지내야지.



남편 덕분에 기회가 생겼다.

낯선 곳에 적응하면서 그래도 믿을 사람은 남편뿐이었다. 가끔 밉상지만 참 고마운 남편이다. 맞벌이였다면 더 빨리 여유를 찾았을 텐데 책임감이 강한 남편은 나에게까지 경제활동을 강요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동안 내가 농사 외 경제활동을 하지 않아도 생계가 유지되었고 대출도 착착 갚아나갔다. 농사에 직장생활까지 능력자 남편이기에 가능했다. 아이들이 조금 크고 자유시간이 생겼을 때, 바깥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준 것도 남편이었다. 남편 덕분에 남들보다 조금 여유 있게 경험을 쌓고 업글인간이 될 수 있었다.






Q. 농사지으며 투잡이 가능한가?
A. 가능하다. 농업인의 수입은 농작물 판매+직불금이다. 직불금은 농사규모에 따라 소농직불금과 면적직불금으로 나뉜다. 소농직불금의 경우, 농업경영체 가족합산 농업 외 소득이 연 3700만 원 이하일 때 신청 가능하다. 반면 면적직불금의 경우, 농업경영체에 등록된 농민 중 직불금을 수령하는 한 사람만 농업 외 소득이 연 3700만 원 이하면 신청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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