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정리
모든 정리가 그렇듯, 처음 시작은 보관할 것과 처분할 것을 구분하는 것이다. 또한 정리의 시작을 책으로 하라는 말도 많이 듣는다. 하지만, 독서 생활자에게 가장 정리하기 어려운 것은 책 아닐까?
읽었지만 다시 읽을지도 모르니까 보관하고,
아직 못 읽었으니까 보관하고,
혹시 나중에 책방이라도 하게 되면 구색을 맞춰야 하니까 보관하고,
초판이니까 보관하고,
사인본이니까 보관하고…
도대체 치워버릴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급하게 찍어 본 우리 집 책장 한 켠은 (그나마 정리가 되어있는) 종류도 다양하고, 역사도 제각각이다. 바로 어제 들인 책부터, 십여 년 전부터 있던 책까지. 한 옆에는 남의 책도 있고, 도서관 대여도서도 한 무더기이다. 이 많은 책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정리의 기준도 다양한데, 오늘 새로운 기준을 소개하려 한다. (아직 시도는 안 해본 정리의 기준이니 참고하시길)
작년부터 구독해 꾸준히 읽고 있는 경제 블로그가 있다. 그곳의 주인장은 매일 글을 발행할 뿐 아니가, 인사이트나 사고를 확장하는 것, 상황을 해석하는 것 등이 모두 남다르다. 아니 탁월하다. 숨겨진 1%를 해석할 뿐 아니라, 드러난 99%도 다르게 해석하는 비범한 분이다. 그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소개한 글이 있었다. 비법은 책장 파먹기. 대학시절부터 도서관 책장을 도장 깨듯 읽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다양한 분야의 책을 아무 선입견 없이 골라 읽는 것이다. 중년이 된 지금도 주말에는 그렇게 도서관 책장 투어를 한다고.
흔히 애독가라고 하면 책을 좋아하는 것뿐 아니라, 많이 읽는 사람을 의미한다. 구매해서 읽기도 하지만, 도서관 대출도 많이 이용한다. 도서관 책장 앞에서 책을 고르는 시간을 즐기고, 책표지와 목차 보기도 전혀 지루해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보통은 늘 한 곳에 머문다. 800번대 앞에서 맴도는 것 같은.
보통은 개인적인 선호도를 가지고 독서를 시작한다. 누구는 자기 계발서에 꽂혀있고, 어떤 이는 소설만 읽고 싶어 한다. 지식과 정보를 얻는 책 위주의 독서도 흔하다. 내 독서의 호오를 구분하는 사람은 일정정도 독서의 시간이 깊어진 경우다. 이조차 취향이 없는 사람은 ‘무슨 책이든 다 좋다‘거나 ’책을 왜 읽냐’는 사람일 것이다. 따라서 편독은 자연스럽다.
중요한 것은 나의 편독 스타일을 아는 것이다. 어떤 분야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면 싫어하지만 읽어보겠다는 마음과 독서 단계를 올리고자 하는 전략을 세울 수 있다.
책의 십진 분류도 있지만, 독서의 난이도, 다시 말해 요구되는 사고력의 단계별로 장르를 구분할 수 있다.
1단계 (혼자 읽고 정리하면 된다. 다른 의견이나 배경지식이 없어도 무방하다. 쉽게 잘 읽혀야 하는 것이 이런 종류의 책들의 필수 조건이다.)
- 인터넷 소설/추리소설/현대 에세이/자기 계발/교육서, 양육서 등
2단계 (나의 생각을 정리했어도 타인의 생각이 들어오면 혼란이 생긴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며 호기심이 인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어떻게 그런 해석이 가능하지?)
- 현대 장편소설, 현대 단편소설, 장르 소설, 사회과학, 예술, 경제경영, 과학에세이 등
3단계 (나의 입장이 정해지고, 비판적, 추상적 사고가 가능해진다. 깊은 독서를 요구하고, 책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질문을 마주한다. 이에 답하기 위해 종합적 사고를 경험한다.)
- 문학상 수장작, 고전 장편, 고전 단편, 철학 에세이, 시, 비평서, 철학, 이론서, 과학이론서, 역사 개념서 등
이제 나의 독서 호오를 좋음/중간/보지 않음의 3가지로 분석한다.
1) 위의 예시들에서 ‘좋아서 자주 보는 분야‘를 골라 ‘좋음’으로 정리한다. 몇 개월 전에도 봤고, 다음 달에도 선택할 확률이 높은 분야이다.
2) 1)에서 선택하지 않은 분야는 모두 ‘보지 않음‘에 정리한다.
3) 2)의 ‘보지 않음’에 있는 분야 중, 싫어하지만 보고 있는 책들을 ‘중간’으로 분류한다.
정리하고 보니, 나는 문학에 많이 치우친 독서를 하고 있었다. 오래전에는 거의 비문학 독서 위주였는데, 요즘은 문학이 많다. 보지 않지만, 그래도 읽으려 하는 책들, 이런 책들은 보통 독서모임에서 읽는다. 혼자서는 잘 안 읽으니까. 가운데 칸을 많이 채우려고 하는 것을 ‘개방적 편독‘이라 한다. ’읽기 싫어도 읽어야지‘하는 마음이 담기는 책들이다.
책장을 정리할 때는,
두 번째 칸의 도서들을 가장 눈에 띄는 곳에 배치하면 어떨까?
좋아하는 분야는 찾아서라도 읽는다. 어디에 있는지 눈을 감고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칸에 있는 책들은 우리 집에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한다. 그래서 가끔 두 권이 된다. 눈높이에 있는 칸에, 손이 닿기 가장 쉬운 칸에, 분야와 난이도를 적절히 섞어서 정리해 보자. 독서력을 높이는 정리법이 될 것이다.
“나는 소설은 안 읽어.”
“나는 자기 계발서는 안 읽어.”
각자의 취향이다. 존중받아야 하는 개취.
하지만 독서 생활자라면 취향의 폭을 넓혀야 한다.
분야별로 독서법도 다르고, 나누는 과정도 다르다.
어느 순간, 자신의 취향이 변하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개방적 편독가가 돼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