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독서 생활자의 취미, 필사

손 끝으로 다시 읽기

by 부키

마치 학습과 숙제처럼, 책을 읽는 것과 함께 하는 것이 있다.

독서 기록이다. 기록의 형식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취미처럼 즐길 수 있는 것이 필사 아닐까?


책을 읽은 후, 기억나는 것이 없다거나, 무엇을 남겨야 할지 막막하다면 필사를 권한다. 어떤 이는 필사를 위한 독서를 하기도 한다. 독서와 필사를 다른 영역으로 인지할 만큼 필사의 매력은 다양하다. 개인이 얻는 가치도 다르다. 본 글에서는 독서와 관련한 필사를 주로 이야기하려 한다.


최근 얼마 전까지 필사가 매우 유행이었다. 필사를 위한 책도 여러 권이 나왔다. 출판사마다 그들이 판권을 갖고 있는 책을 소재로 필사용 도서를 만들기도 했다.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몇 권의 필사용 도서를 갖고 있다. 여러 문장을 모아 만든 책, 한 권의 책에서 주요 문장을 수집한 책 등, 주로 문장위주다. 이때, 독자가 선택하는 기준은 책의 품질이다. 다시 말해, 필사에 적합한 책의 형태를 갖추었는가, 펼쳐짐, 종이의 질 등이다.

하지만, 이런 필사 전용 도서는 책을 제대로 읽었다고 보기 어렵다. 독서에서 얻는 의미보다 문장을 따라 쓰며 생각하는 의미가 더 크다. 나름의 매력이 있어, 많은 인기를 얻었다. 한 권을 모두 필사하면 성취감도 생긴다. 내 손글씨를 잘 담은 한 권의 앨범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담겨진 문장은 나의 선택이 아니다. 주어진 대로 필사한 수동적 행위가 된다.


독서와 필사를 함께 하면 나의 문장이 생긴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남긴 적극적 참여가 이루어진다.

무엇을 필사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말씀을 많이 하신다. 그럴 때는 책을 먼저 잘 읽으라 말씀드린다. 단, 읽으면서 마음에 남거나, 아님, 불편하게 하는 문장을 표시하고, 이를 옮기는 것을 추천드린다. 대부분 이렇게 시작하지 않을까?


오랫동안 필사를 해오면 나름의 요령과 기준이 생긴다.

그중 몇 가지를 정리해 보면,


앞서 이야기한 대로 나의 기준으로 중요 문장을 선별한다. 그 문장을 옮겨 적는다 생각하면 되는데, 문장을 다시 읽고 적은 후에 내 생각을 가볍게 더하는 것을 추천한다. 왜 이 문장을 선택했는지의 근거를 남기는 효과도 있다. 그때의 나의 생각과 느낌을 남기는 메모라 생각하면 좋다.



뽑아 놓은 문장 모두를 필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노트 지면의 제한을 두면 오히려 정제된 선택이 가능하다. 다 좋지만, 더 좋은 문장을 고르는 것 역시 또 한 번의 독서 경험이다.


문장이 아닌 단락의 단위, 혹은 페이지 단위로 필사하기도 한다. 책의 핵심 문단이라고 생각되거나, 작가의 의도, 주제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문단, 페이지가 있다면 통으로 필사한다. 한두 문장보다는 단락을 가져올 때, 앞뒤 맥락을 읽을 수 있다. 이 때도 빼놓지 않는 것은 나의 생각을 더하는 것이다. 본문의 내용과 구분되도록, 주로 펜의 색깔을 달리해서 쓰고 있다.



책의 분량이 많고 나누어진 챕터가 많은 경우에는 챕터별로 문장을 선택해서 필사하는 것을 추천한다. 이는 방대한 분량을 정리하며 읽는 효과도 있고, 필사를 수월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다. 예를 들어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유희 1,2>는 분량에서 먼저 압도되고, 그 내용도 여러 번 생각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필사를 하는 중간에도 펜의 움직임을 멈추고 다시 고민하게 되는 부분이다. 이런 책을 읽을 때는 나름의 구조를 먼저 잡는다.


독서 시작 전에 필사 노트 구성을 마친다. 도서의 기본 정보를 적고, 주요 인물들을 메모한다. 챕터별로 칸을 나누어 놓고 한 챕터 읽을 때마다 문장을 옮긴다. 좋은 문장을 모두 필사한다면 통필사를 하게 된다. 지면에 제한을 두는 것이 좋다. 먼저 프레임을 만들고 그 안을 채우는 것을 추천한다. 문장과 나의 단상을 함께 적는다. 독서를 마치는 순간, 필사 노트도 완성된다. 이렇게 방대한 책은 독서 후의 필사가 쉽지 않다. 문장은 너무 많고, 내용의 연결도 매끄럽지 못하다. 마치 쌓인 숙제처럼 느끼게 된다. 책을 나누어 읽고, 그때마다 정리하는 것이 좋다. 물론, 개인적 의견이지만.


독서 생활자는 문구인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필사를 하다 보면 필사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손글씨로 써야 하기에 좋은 펜과 좋은 노트, 종이에 대한 욕심이 생긴다. 평소에는 제트스** 펜이면 충분했지만, 필사를 위해서는 무인**의 젤펜이라던가, 주스* 등의 중성펜을 선호한다. 더 좋은 것은 만년필이다. 만년필 역시 입문과 동시에 끝도 없는 세계의 심연을 보게 된다. 만년필을 택한다면 노트도 신중히 선택해야 한다. 만년필 잉크가 번짐 없이 스며들어야 하고, 뒷비침이 적은 종이를 골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종이는 보통 가격이 비싸다. 흔히 쓰는 노트 가격의 몇 배를 넘어간다. 하지만, 일 년에 한 두권 정도의 필사 노트를 쓰게 된다면 그 정도는 투자할 수 있다. 취미에 대한 투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념 같은 스티커나 마스킹 테이프. 단조롭게 글씨만 있는 것보다 포인트를 주면 산뜻하다. 어떤 이는 오로지 글씨로 채우기도 한다. 이 역시 개인의 취향이다.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


필사를 많이 하다 보면, 고정된 자세로 인한 부작용이 생긴다. 그래서 요즘은 필사가 아닌, 필타를 하는 분도 많다. 디지털 기록으로, 키보드로 문장을 남기는 것이다. 이에 적합한 어플도 여러 가지 있다. 노션이나 문서 파일을 쓰기도 하고, 독서 전용 앱을 쓰기도 한다. 이 역시 개인의 선택이다. 하지만, 노트가 쌓여가는 기쁨을 대신할 순 없을 것. 아카이빙의 한계가 있지만, 보완의 수단을 갖는다면 우선은 손글씨 필사로 시작하면 어떨까? 이는 또 한 번의 독서 경험을 가져온다. 손 끝으로 다시 읽는 경험. 나의 생각을 작가의 문장과 함께 배치하는 경험. 독서를 풍성하고 깊게 만들 것이다.

keyword
목요일 연재
이전 03화독서 생활자의 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