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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 Mar 22. 2023

'항공사고 수사대'의 무상감

문학 갈래는 실재하는 개념인가

 “I think people enjoy watching other people's tragedies.”

 베트남 노상 식당에서 만난 미국인 파일럿은 '항공사고 수사대'를 즐겨 본다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그는 내가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은 '타인의 비극을 관조하는 것'이라 이야기했다. 충격이었다. 나는 타인의 비극을 유희로 삼는 사람인가? 영어 공부를 위해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한 영미권 다큐멘터리를 즐겨 보던 나에게 그의 표현은 재앙이었다. 순식간에 빈곤 포르노그래피를 즐기는 사람들과 동격이 된 기분이었다.

 다큐멘터리의 구성을 고민했다. 항공사고수사대 뿐만 아니라 모든 다큐멘터리는 '있었던 일'을 토대로 만들어진다. 미스터리를 탐구하는 내용이라면 간혹 사람들의 상상이 들어가기도 하지만, 적어도 그 기원이 되는 증거물은 남아 있다는 의미이다.

항공사고수사대 포스터 (출처 : TMDB)

항공사고수사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 다큐멘터리는 항공사고가 일어나야만 제작될 수 있다. 누군가는 이 다큐멘터리가 없어지는 것이 인류 과학 진일보의 정점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Special Season을 제외하고도 23시즌까지 제작되고 있는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아직 항공사고의 완벽한 예방은 불가능해 보인다.


 '메이데이 메이데이’

 두 번의 구조 신호로 다큐멘터리는 시작된다. 이는 항공기의 국제 무선 조난신호다. 내가 지금까지 영화의 오프닝처럼 여겼던 부분이 누군가의 절실한 구조 외침이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자조감이 밀려들었다. 한 편의 항공사고수사대 다큐멘터리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사고 당시의 영상이 남아 있다면 그대로 활용하기도 하지만 영상이나 사진 자료가 미비한 경우, 항공기 블랙박스가 거의 타서 남아 있지 않은 경우에는 재연배우들이 등장해 사건을 재현한다. 시나리오를 극화한 장면이 삽입되는 셈이다. 이어서 등장하는 이야기는 항공사고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과정이다. 사고 조사는 사후적으로 이루어지며 그 과정에서 조사관들은 다양한 가설을 세우고 기각하기를 반복한다. 통상적으로 하나의 사고를 분석하고 결론을 내는 데에는 2~3년 정도의 긴 시간이 걸린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나고 증거물이 잘 보존되는 자동차 사고와는 전혀 다른 특성이다. 시청자들은 조사관들이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과정을 함께하며 그들이 세운 가설에 나름의 합불판단을 더한다. 또한 상상력으로 사건을 추리하기도 하며 인지적 과정을 거치고 나면 클라이맥스 쯤에서 결론이 나온다. 결론의 양상도 다양하다. 조종사의 개인적인 일탈인 경우도 있고 비행기 구조 자체의 엄청난 결함인 경우도 있다. 마지막은 예외 없이 조사관들이 항공 관계자들에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위의 서술에서 서사, 극, 교술의 특성을 모두 찾아낼 수 있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는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플롯을 가진 이야기이다. 또한 삽화 형식으로 사고 당시 상황을 재연하는 장면이 들어간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가 시청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파일럿들을 위한 교보재로 활용되기도 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는 또한 교술이다. 결국, 문학의 네 갈래 중 하나로 분류하는 것은, 특히나 영상 작품에서, 불가능에 가깝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감상자는 작품을 통해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 감상의 과정은 기존의 인식체계를 매개로 만들어진다. 필자의 경우 미국인 파일럿이 'tragedy'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전까지 다큐멘터리를 언어 공부 수단 이상의 것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 외부에서 새로운 프레임을 던져주었기 때문에 그것을 적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요구되는 것은 포용력이다. 타인의 불행을 수단으로만 이용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함의를 찾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호치민 전쟁박물관. 이 사진은 1966년 퓰리처 상을 받았다.

 파일럿과 헤어진 후, 베트남 전쟁박물관과 베트콩들이 활동했던 구찌터널, 호치민 미술관 등을 둘러보았다. 'tragedy'라는 프레임을 토대로 바라본 그곳들은 인간이 살아 숨쉬던 공간, 누군가의 고통이 서린 공간, 비극적인 살육을 중단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승자로서의 베트남을 볼 것이고 패자로서의 미국을 볼 것이다. 혹은 이데올로기 전쟁이 벌어졌던 치열한 이념대립의 장을 볼 수도 있다.

 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감상자가 받아들이는 바에 따라 문학의 갈래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짧은 시를 보고도 누군가는 서사를 떠올릴 수 있고 딱딱한 비문학에서도 누군가는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문학의 갈래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예술에 수식을 갖다 붙이는 것도 무의미하다. 나는 이에서 무상감을 느낀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에서 '프레이밍의 필요성'을 다시금 자각한다. 외부의 정의에 따라 나의 감상은 영향을 받을 것이고, 그렇게 피어난 감상은 또다시 외연으로 확장될 것이라고 믿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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