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역설

by 레어버드

감정적 갈망을 내려놓자 슬픔이 밀려왔다.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극복하려고 엄마에 대한 감정적 갈망을 내려놓자 눈물이 흘렀다. 마음속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끊어진 기분이었다.

상실감과 공허함이었다.


내가 가졌어야할, 혹은 바랐던 엄마와의 관계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그 관계가 현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자 그 자리를 슬픔이라는 아이가 꿰차고 들어왔다.

어쩌면 내 안에 여전히 엄마의 사랑을 간절히 바라는 ‘어린 아이’가 있는데 그 놓아주지 못한 아이를 잃어서 슬픈지도 모르겠다. 엄마에 대한 감정적 갈망을 내려놓는 건 그 ‘아이’의 가장 깊은 소망을 포기하는 것이기에...


그리고 감정적 갈망인 희망의 끈을 의도적으로 끊어내면서 엄마와의 연결성 자체가 사라진 것 같았다. 마음이 헛헛했다.

내가 겪은 트라우마를 완전히 인정하고 ‘엄마가 나에게 필요한 감정적 지지를 줄 수 없다’는 냉정한 현실을 마주하는 일이 힘들었다. 고통스러운 진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이렇게 슬퍼질 줄은 몰랐다.


엄마가 해주던 된장찌개, 언제나 새 옷처럼 깨끗하게 빨아 다려 입혀주던 옷가지들, 늘 포근하고 아늑한 이부자리, 먼지 한 톨 없을 정도로 반질반질한 방바닥, 뽀드득 윤이나는 그릇들, 엄마에 대한 나의 좋은 기억이다. 엄마는 나를 돌보고, 먹이고, 재우고, 보호해 주었던 안전기지였고 그 기본적인 돌봄에 대한 경험은 진실했다. 이제 그마저도 잃어버리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왜 저렇게 완벽하게 된장찌개를 끓이고 방이며 옷이며 깨끗하게 해준 엄마가 나를 그렇게 때리고 억압하고 내가 가장 필요로 했던 감정적 지지를 채워주지 못했을까?’라는 모순에 슬프고 고통스러웠다.

보글보글 끓여준 따뜻한 된장찌개의 기억이 ‘만약 완벽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좋은 보살핌의 기억들이 나의 간절한 바람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그래도 엄마에게 좋은 면이 있었어.’라며 부분적으로 좋았던 관계에 대한 애착이 감정적 갈망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더 힘들고 슬펐다.


여지껏 엄마에게서 받은 돌봄과 보살핌에 대한 기억과 폭력과 억압에 대한 기억은 늘 내 마음속에서 한데 섞여 충돌했고 그로인한 혼란과 슬픔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그 모순된 경험으로 인한 감정을 분리하려고 애를 쓰며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은 엄마에 대한 갈망을 내려놓자 분리되었던 기억과 감정들이 재통합되면서 커다란 슬픔으로 다가왔다.

‘엄마는 나에게 따뜻한 돌봄을 제공했지만, 무서운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다’는 명백한 진실을 인정하고 감정을 분리하는 연습을 해야 했다. 내가 나의 엄마가 되어서 성인인 ‘나’가 어린 ‘나’를 돌보기 시작했다.


인간은 때로 가장 고통스러운 감정을 재처리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치유의 역설이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깨달음으로 인한 슬픈 눈물은 상처가 아물어 상흔으로 남기 시작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나의 감정적 갈망을 포기하고 내려놓자 온전한 나 자신이 되고 해방감이 들었다.

엄마에게서 벗어나 호주행 비행기에 탈 때 느끼던 자유로운 해방감이 아닌 자율적인 해방감이 들었다.

그리고 이젠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고 돌보며 사는 삶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 받아들일 수 있어서...

이전 09화노르웨이의 밤과 엄마의 대성통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