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르담 데 샹의 소녀

by 김진용




여행차 파리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나는 묵고 있던 랑뷔토역 근처에서 출발해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금요일이었지만 나름대로 한적한 파리 시내를 걷다 보니

약속시간에 가까워져 급하게 보이는 마들렌 역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 나는 어젯밤 유명 명소라는 책방에 들려 산 책 한 권을 들고 지하철에 올라탔다.

(영화광인 내가 사랑하는 감독 중 한 명인 마틴 스콜세지에 관한 책이었다.)


책갈피를 젖혀 책을 폈고 지하철 문이 굳게 닫혔다.

역과 역 사이의 거리가 짧은 파리의 지하철은 일 분도 채 되지 않아 다음 역에 다다르고 있었다.

금요일 저녁의 콩코드 역 근처인지라 많은 인파가 지하철로 몰려 들어올 것 같았다.

몇몇의 사람들은 출구를 나가기 위해 주섬주섬 자신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프랑스 유명 축구팀, 파리 생제르맹의 경기가 있는 날인지 축구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그중 한 중년의 남자가 자신의 서류 가방과 챙이 짧은 중절모를 쓰고 걸어와 내 앞을 가렸다.

키는 160이 채 되지 않는 단신에 무채색 그레이 슈트를 입고 있는 인도계 프랑스 남자인 것 같았다.

여느 때와 같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 듯 보였다.


나는 읽던 책을 덮고 잠시 인파가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


곧이어 누군가 손잡이를 잡아당기며 지하철 문이 열렸고 하나둘씩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앞에 있던 중년의 남자 역시 천천히 걸어나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책을 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대략 4초 정도가 흘렀을까,

순간적으로 누군가의 분노 섞인 목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며 지하철 내부는 혼돈으로 이어졌다.


키가 190은 되어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젊은 남자가 얼굴을 붉혀가며 누군가에게 욕을 퍼붓고 있었다.

(불어를 잘 알진 못하지만, 뉘앙스로 봤을 때 욕이 확실했다.)

얼굴은 대략 20대 중반쯤 되어 보였고 파리 생제르맹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내였다.

대충 상황을 보아하니 지하철을 내릴 때 누군가 자신의 신발을 밟았고

순간적인 분노를 참지 못하여 화를 내고 있는 상황으로 보였다.

급기야 그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 사람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인산인해를 이루던 지하철의 사람들이 이리저리 흩어지고

한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지하철 내부로 쓰러졌다.


불과 몇 초 전 내 앞에 서 있던 중년의 인도계 프랑스 남자였다.


그의 중절모가 바닥에 나뒹굴듯 힘없이 떨어졌고 그 순간 지하철 문이 다시 닫히며 열차가 출발했다.

생제르맹 유니폼을 입은 남자는 출발하는 열차를 향해 더 크게 화를 내고 있었다.


문이 닫히자 열차 내 모든 승객은 쓰러진 그 남자를 멍하니 쳐다봤고

곧이어 나를 포함해 정신을 차린 몇몇의 승객들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중년의 남자는 힘겹게 일어섰다.

충격을 받았는지 그 역시도 멍한 상태로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한 여자가 혼이 나간 그의 손에 떨구어진 서류 가방을 들려줬고

나는 내 옆에 떨어진 그의 중절모를 주워 말없이 그의 손에 끼워줬다.


그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한동안 같은 자세를 유지한 채 서있었다.

그의 시선은 바닥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열차는 다음 역에 도착했고 다시 몇몇의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때 한 여자가 걸어나가며 그녀가 들고 있던 한 다스의 꽃다발을

그 중년의 남자 손에 살포시 들려주었다.

그러고는 굳게 닫히는 지하철 창문 안의 그 남자를 바라보며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붉은빛과 주황빛이 뒤섞인 메리골드 몇 송이가 꽂혀있는 꽃다발이었다.


남자는 살포시 고개를 들어 창문 밖 여자를 잠시 바라보다 이내 꽃다발로 시선을 옮겼다.

남자는 열차가 다음 역에 도착할 때까지 한동안 꽃다발을 무심히 쳐다보았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각자의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눈을 감아 몽상에 빠지거나,

창밖을 바라보거나 혹은 자신의 일행과 조용히 대화를 다시 이어나갔다.


열차는 다음 역에 도착했고 남자는 문이 열려 사람들이 드나들 때에도

한참을 미동 없이 꽃다발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열차의 문이 닫히자 남자는 결심이라도 한 듯 고개를 들어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꽃다발을 들어 올려 그 속에 꽂힌 꽃송이들을

한 송이씩 뽑아 주변의 승객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는 침묵을 유지했다.


다섯 번째였을까.


나는 그중에서도 운이 좋게 다홍빛의 메리골드 한 송이를 건네받았다.


그렇게 대략 열명 남짓의 승객들이 그로부터 꽃을 건네받았고,

뜻밖의 선물을 받은 그들은 모두 활짝 웃으며 그 남자에게 감사를 표했다.


"Merci."


그는 가벼운 목례와 함께 단 한 송이의 메리골드 만을 손에 쥐고 빈 좌석에 가 앉았다.

그가 남긴 메리골드 한 송이는 마치 작은 희망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다음 역인 노트르담 데 샹 역에서 지하철 칸을 빠져나왔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오자 요란스러운 시위대의 시위 소리가 들렸다.

도로를 전면 통제한 걸 보니, 규모가 꽤나 있는 시위인 듯했다.

그중 어머니와 함께 시위에 참여한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10살쯤 되어 보이는 그 아이는 무표정의 얼굴로 작은 피켓 하나를 들고 있었다.

(관광객들을 고려해 피켓은 영어로 쓰여 있었다.)


"폭력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행위는 사랑뿐입니다!"


잠시 후, 나는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고 소녀는 피켓을 힘껏 더 높이 치켜들며

가녀린 목소리로 피켓에 쓰인 문구를 더욱 힘차게 외치기 시작했다.


"폭력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행위는 사랑뿐입니다!"


나는 소녀에게 웃으며 다가가 건네받은 메리골드 한 송이를 쥐여주며 함께 소리쳤다.


"폭력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행위는 사랑뿐입니다!"


10년 전, 7월 12일 수요일 오후 8시 28분.


여행차 파리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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