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싸움을 한다.
갈등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살면서 반드시 겪게 되는 것이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이다. 생각해 보면 갈등이라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을 통하고, 대화를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쉽게 생길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요즘은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도 시비를 거는 시대지만..)
나는 싸움을 싫어하는 아이였다. 평소에는 자타공인 딸바보지만 지나치게 효자였던 아버지는 엄마가 시댁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드러내면 바로 소리를 지르곤 했다. 가뜩이나 다혈질인 성격이셔서 한 번 화가 나시면 중간에 멈추는 법이 없고 거의 복식호흡 법으로 마음껏 불을 뿜어내야만 그 싸움은 끝이 났다. 가끔 이혼 관련 프로그램을 보면 아이들은 각자 방에서 숨도 못 쉬고 있고 거실에서 고성이 오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게 바로 우리 집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아버지에게 안기기도 하고 괜히 장난을 치기도 하면서 부단히도 애를 썼다. 그런 모습을 많이 보고 살아서인지 [성질은 있지만 뒤끝은 없다]라는 말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말이 되었고 그런 사람들이 혹여라도 주변에 생기면 무조건 피했다. 남자들이 내는 커다란 목소리만 들어도 심박수가 바로 치솟았기 때문에 누군가와 연애를 할 때면 나는 갈등이 생길만한 일도 눌러 참거나 아니면 아주 관계를 끊어버리고 도망치는 나쁜 버릇이 생겼다. 겉으로 아무렇지 않게 잠잠하게 웃던 애가 하루아침에 [자 이제 여기까지. 너랑 나는 안녕] 하고 돌아서버리니 다들 나보고 피도 눈물도 없이 차갑다고 했다.
내가 누군가와의 갈등에 정면으로 부딪히게 된 시기는 바로 유치원 교사라는 직군에 발을 들이면서부터이다. 작년에 한창 뉴스에서 떠들썩했던 [갑질 학부모] 이슈는 사실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진 자라면 오래전부터 마주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아이 우유가 너무 차가워서, 조용히 하라고 다그쳐서, 계단에서 친구를 밀어버리는 것에 대해 훈육을 해서, 교실이 춥다고 혹은 덥다고 해서 등 정말 수많은 이유로 나는 매일 전쟁을 치렀다. 처음에는 매번 울면서 퇴근길에 올랐던 햇병아리 교사는 매일같이 불면증과 이명에 시달릴 수 없어서 스스로를 방어하는 힘을 기르기 시작했다. 10년이 지난 이후로는 그 어떠한 고성을 들어도 세상 차분한 목소리로 ( 사실 마음은 차분하지 않다) 상대의 말에 동의하는 듯하면서도 내 주장의 타당성을 조목조목 일목 요연하게 말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가장 싸우기 싫어하던 아이는 사회라는 틀 안에서 쉽게 흔들리지 않는 마음과 꽤나 날카로운 말발을 가진 어른이 되었다.
남편은 바로 나의 말발과 불만이 있으면 기어코 해결을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정점을 찍었던 시기에 처음 만났다. 왜 하필 레벨업이 될 대로 된 나를 만났는지... 어쨌든 서로 너무 다른 삶을 살았던 지라 그와 나는 잘 맞는 듯하면서도 안 맞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렇다 한들 예전과 같이 관둬버리기에는 나도 드디어 철이 들었고, 평생을 함께 할 사람과는 살면서도 수도 없이 마주쳐야 할 상황일 것이기에 바로바로 입 밖으로 불편하거나 이해가 안 되는 점들을 끄집어냈다. 물론 매번 바가지를 긁은 건 아니고, 한 4번 정도 참았음에도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면 제대로 대화의 장을 열었다. 아무리 참았다 한들 거의 마음이 고슴도치 수준이었던 나는 꽤나 말이라는 화살로 그를 내리꽂았다. 꽂는다 해서 소리를 지르거나 하는 장면은 없었다. 그저 한 문장씩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를 깡그리 담아 말했을 뿐.. 그는 처음에는 참고 잠잠히 있었다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거나 혹은 화를 내거나 하는 단계로 반응을 보였다. 정말 다행인 것은 그 또한 괄괄하지 않고 좋게 넘기려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던지라 세상 까다롭게 이리저리 떠드는 나를 보면서 어떻게든지 이해하려고 노력을 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마 여느 매체에 나오는 문제 부부들처럼 우리도 싸웠을지 모른다. 내가 스스로 문제라고 여긴 것들을 말하면서 네가 틀리고 내가 맞아! 식으로 주장하다가 울고야 마는 아내를 남편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분명 남편도 내가 고쳐달라 하는 것을 고쳐보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고 있었을 터인데 나는 그 노력을 보기보다는 결과를 놓고 말을 했다. 이런 걸 보면 늘 내게 [그 과정이 어쨌든 간에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지가 중요한 거야]라고 말하셨던 부모님을 내가 닮긴 닮았나 보다. 1년 정도 지난 후부터, 그러니까 남편을 내가 사귈 때까지 포함하여 곁에서 지켜본 지 2년 정도가 흘렀을 때, 뾰족 뾰족하던 말투에 조금은 둥근 부분이 생겼다. 물론 나랑 함께 살고 있는 남자는 어찌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를 진심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불만 사항을 이야기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전과 다르게 나의 말에는 [당신을 이해해보려고 해]라는 마음이 함께 했다. 그리고 좀 웃기지만, 마음이 힘들거나 이해가 되지 않을 때면 홀로 있는 시간에 성경을 펼쳤다. 참고 참고 또 참는 것이 사랑이라고 가르치시는 말씀을 읽어보면서 참지 말고 다 내뱉어버렷! 하는 내 모습이 오버랩이 되고 또 [미안해요..] 하면서 슬픈 곰이 되는 남편의 모습이 그 위를 덮는다. 내가 뭐라고 기세 등등 해서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나. 기독교인에게 정말 성경은 스스로의 행동을 반추하고 반성하기에 가장 안성맞춤인 지침서라는 것을 결혼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부부, 특히 신혼부부 사이의 갈등은 서로가 미워서 생기는 것이라기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잘 몰라서 생기는 것 같다. 결코 애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애정이 넘치다 보니 [왜 내가 원하는 걸 안 해주지?] 하는 섭섭한 마음이 커지면서 생기는 갈등.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는 것은 서로 간의 기싸움도 아니고, 누가 더 잘못했는지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상대를 위해 그 상대가 정말 싫어하는 행동을 참아주고, 또 상대의 행동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를 이해해보려고 하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하기에 이해하고 한 번 걸음을 맞춰보겠다는 그런 서로를 향한 애정의 마음에서 시작한다면 갈등은 그저 싸움이 아닌 서로를 더 알아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