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우리 옛 그림에 대한 어린이책을 쓰면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선비 화가, 겸재 정선(鄭歚 1671 ~ 1751년) 을 다룬 적이 있다. 정선은 당시 조선 화가들이 중국풍의 관념적인 산수화를 그리던 것과는 달리 우리 산천을 직접 답사한 후 그 참모습을 조선 사람의 정취를 담아 그려낸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畫)’를 개척한 인물로 이름이 높다.
정선의 작품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비가 그친 후 하얀 물안개가 피어난 인왕산을 그린 국보 제216호『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금강산 일만 이천 봉우리를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듯 하나의 화폭에 담아낸 국보 제217호『금강전도(金剛全圖)』, 지금의 북한 개성(송악)에 있는 천마산 박연폭포를 그린『박연폭포』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정선 <인왕제색도> , 138.2*79.2cm, 종이에 수묵 담채, 국립중앙박물관
그런데 나는 위에서 언급한 대표작들도 물론 좋지만『인곡유거도(仁谷幽居圖)』와 『인곡정사(仁谷精舍)』,『독서여가(讀書餘暇)』에 마음이 무척 많이 끌렸다. 정선은 52세 때 인왕산 자락 옥류동에 집을 마련하고 ‘인곡정사(仁谷精舍)’ 라고 부르며 84세에 생을 마칠 때까지 머물렀는데, 세 그림은 모두 그 집에 머물 때의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여기서 ‘인곡’은 인왕산 골짜기를, ‘정사’는 심신을 갈고 닦고 학문을 익히는 곳, ‘유거’란 마을과 멀리 떨어진 외딴 집이라는 뜻이다.
『인곡유거도』에는 인왕산의 모습과 함께 산자락에 있던 정선의 작고 소박한 기와집이 등장한다. 『인곡정사』에는 정선이 살았던, 산자락 녹음에 둘러싸인 인곡정사의 모습을 상세히 엿볼 수 있다.
정선 <독서여가> , 17*24.1cm, 견본 담채, 간송미술관
그리고 정선의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독서여가>에는 사랑채 툇마루에 나와 앉은 선비가 모란 화분을 바라보는 모습이 담겨 있다. 선비의 손에는 부채가 들려 있고, 방안 서가에는 서책들이 층층이 쌓여 있다.
그런가하면 앞서 말한 저 유명한『인왕제색도』에도 그림 오른쪽 아래에 고즈넉한 집 한 채가 그려져 있다. 그 집이 누구 집인지는 밝혀지지 않아 논란거리인데 정선의 집이라는 설, 정선의 절친이었던 시인의 집이라는 설, 정선 그림의 주요 고객이었던 어느 판서의 집이라는 설 등, 가설이 많다. 하지만 내게는 그 집이 누구 집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인왕산 산자락에 있던 옛집이라는 것이 중요할 뿐.
얼마 전 서울 종로구 윤동주 문학관 가까이에 있는 한옥 도서관인 <청운문학도서관>에 들렀을 때, 내 머릿속엔 정선의 그림들이 떠올랐다. 도서관이 정선의 그림 속에 있던 집들처럼 인왕산 자락에 고즈넉하고 예스러운 분위기를 품은 채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왕산 자락은 넓어서 정선의 인곡정사가 있던 곳과 청운문학도서관은 다소 거리가 있다.)
나는 윤동주 문학관을 지나 시인의 언덕을 거쳐 내리막길에 있는 계단을 따라 청운문학도서관으로 갔는데, 그러다보니 도서관의 기와지붕부터 볼 수 있었다. 초록으로 우거진 여름 나무들 사이로 한 눈에 들어온 한옥 도서관의 기와지붕은 정말 그 자체가 한 폭의 그림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청운문학도서관의 한옥 지붕에 올린 기와는 돈의문 뉴타운 지역에서 철거된 한옥 기와 3천여 장을 재사용해 더욱 의미가 깊다고 한다.)
이어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아름다운 앞마당과 함께 예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한옥 도서관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때의 경이로움이라니!
2014년에 개관한 청운문학도서관은 인왕산의 경사진 지형과 자연 경관을 고려하여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옥 공공 도서관이다. 청운공원관리소로 쓰이던 낡은 건물을 개조해 지었다는데 지하층과 지상층 등 2개 층으로 이뤄져 있고 크기는 매우 작고 아담하다. 인왕산의 경치를 해치거나 지나치게 튀지 않게 짓는 것, 인왕산의 능선은 물론이고 사게절의 자연과 어울리게 짓는 것을 모토로 삼았다고 한다.
그래서 지상층은 한옥으로 되어 있고 조붓한 앞마당과 뒤뜰도 있다. 지하층에 있는 현대식 일반 열람실에서 책을 빌려 지상층에 있는 한옥 열람실에서 책을 읽거나 주변 경관을 구경할 수 있다.
또한 한옥 본채와 조금 떨어진 연못가 작은 별채에서는 인공 폭포에서 떨어지는 폭포수와 물소리를 감상하며 책을 읽을 수 있어 너무나 낭만적이었다. 방문객들은 주로 포토존으로 활용하고 있었지만.
왼쪽: 인공연못 위에 지어진 청운문학도서관 별채 / 오른쪽: 별채에서는 인공폭포에서 떨어지는 폭포수와 물소리를 감상하며 책을 읽을 수 있다.
특히 청운문학도서관은 ‘문학 도서관’이라는 이름답게 문학 서적을 집중적으로 소장하고 있고 문학 관련 프로그램도 다채롭게 진행하고 있다. 청운문학도서관에 내가 쓴 책은 몇 권이나 있을지 검색해 보았더니『내 이름은 이강산』『사월의 노래』를 비롯해 8권이 있었다. 규모가 작아서 그런지 다른 도서관에 비하면 매우 적은 편이었지만 이토록 예스럽고 아름다운 도서관에 내 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고 기뻤다.
청운문학도서관에 처음으로 들른 날, 나는 반나절 넘게 머물며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새 작품 구상도 하면서 너무나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그 옛날 고즈넉한 '인곡정사'에서 책도 읽고 그림도 그렸을 겸재 정선처럼. (겸재 선생이 감히 자신에 비유했다고 화내시지는 않겠지?)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청운문학도서관에 간다면 외관 구경이나 하고 사진만 찍다 오지 말고 꼭 한옥 열람실에 여러 시간 머물며 책도 읽고 사색에 잠겼다 오기를 권한다. 분명 예스럽고 아름다운, 아주 특별한 시간이 될 터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