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여름을 보내는 것이 아쉬워서 바다에 다녀왔어.그곳에서 본 바다는 아주 잔잔한 호수와 같았지. 바람에 물결이 일렁이고 그 무늬가 이뻐서 한참을 바라보게 되더라. 하늘은 얼마나 광활하게 펼쳐져 있던지. 신발을 벗고 바닷속에 발을 담그고 있으니까 발바닥 밑에서 간지럽게 돌아다니는 모래알, 일정하게 들리는 잔잔한 파도 소리, 짭조름한 냄새가 느껴졌어. 살랑이는 바람에 이 순간을 느끼니 잠시라도 '행복하다'라고 생각이 들었지. 그리고 이내 너 생각이 났어.
지난날 네가 이야기했었지.
어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사소한 사건에 불안해졌고 그 불안이 또 다른 불안을 몰고 왔다고. 하지만 그 짙은 불안의 내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고. 그래서 그러고 있는 네 스스로가 한심해서 우울한 기분이 들고, 그냥 이대로 사라지는 게 차라리 낫겠다 싶었다고. 그러고 싶지 않은데 그러고 있는 너 스스로가 싫어서 혐오스러운 마음까지 들었다고. 이 모든 감정이 파도가 돼서 삶을 집어삼키는 기분과 같았다고. 아무것도 할 수도 없고 하기도 싫다고.
그리고 내가 이야기했지.
우리의 목표는 파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의 목표는 파도가 널 다치게 하지 못하도록 파도를 타보는 것이라고. 너도 나도 서핑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그 순간 알았지. 우리한테 파도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였는지. 하지만 파도가 무서운 것이지, 네가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란 걸. 우리는 대화를 하면서 깨닫게 되었지.
그 순간 너는 이해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또다시 올 파도가 무서워 이내 걱정이 된 표정을 지었지.
괜찮아. 나도 때로는 내 삶을 흔들고 집어삼키는 파도를 맞이할 때가 있어. 나 또한 너처럼 우울하고 불안한 생각이 꼬리를 물어 나를 옥죄일 때도 있지. 아마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이러한 감정을 느낄 거야. 그렇지만 그 감정은 하나의 감정이지 네가 아닌걸. 너무 짜증 나는 기분이지 너 자체가 짜증나는 사람이 아니며, 우울하고 불안한 생각이지 너란 사람이 우울과 불안이라는 존재가 아닌 걸. 파도가 덮쳐 이리 저리 몸을 가누지 못하고, 물 밖으로 나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니 그런 너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우리 파도를 보는 연습을 많이 했잖아. 너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 중, 지금 이 순간의 이 것이 파도인지 아닌지부터 가려내는 연습. 그 후 언젠가 네가 파도가 오는 때를 이제는 알것 같다고 했지. 나한테 네가 그 말을 한 뒤부터 우리는 파도를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되었지. "어제도 파도가 왔다 갔어" 너의 그 한마디로 시작된 대화에서 우리는 그 파도가 너를 어떻게 잠식했는지, 파도의 크기가 어떠했는지도 알 수 있었지. 전에는 쳐다보기 조차 무서웠는데 말이야. 잘했어.
괜찮아. 여전히 밀려오는 파도에 잠식되어 두려움에 떨고 우울함과 불안에 힘들지만, 그 순간이 언제인지- 언제쯤이면 파도가 잦아들지- 지금은 파도가 지나간 것인지- 우린 알 수 있었잖아. 한걸음 나아가고 있는 너를 보면, 응원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 때로는 이제 한 걸음을 뗀 상태로 뛰어가길 바라는 널 붙잡으면서 안전이 제일 우선이라고 말하고 걱정했어. 그리고 우리의 대화에서 이야기한 대로 네가 한걸음을 또 나아가 주길 기대도 했어. 이 모든 걸 너에게 다 말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 너무 잘해주고 있다는 사실 하나는 말해주고 싶었어.
있잖아 이 말을 하려고 편지를 썼어.
너 잘하고 있어. 그것이 네가 생각하기에 미비할지라도.
p.s 미비하다고 생각이 들더라도 네가 미비한 사람이 아니야. 알지?
'너에게'는 그동안 나를 만났던, 만나고 있는 내담자들을 떠올리며, 가상으로 각색하여 쓴 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