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굴리듯이 01화

[어른 동화] 굴리듯이 1화

1화 두더지 옷장

by 오후세시


책장에는 여러 가지 책이 꽂혀 있었다. 구황작물로 만드는 요리 비책, 일본에서 유명하다는 작가가 쓴 소설책. 그리고 그 너머에 출처를 알 수 없는 종이가 반이 접힌 채 책 사이에 껴있었다. 작년 크리스마스에 받은 카드도 꽂혀있었고, 그 옆에는 병원에서 준 설명서도 2번 접힌 채 껴있었다. 옷장도 그러했다. 잘 개켜서 가지런히 정렬해놓은 옷과 옷걸이에 걸려있는 옷가지들이 있었으나, 그 위로 알 수 없는 봉지와 물건들이 쌓여 문을 제대로 열 수조차 없었다. 그나마 왼쪽에 공간이 있어서 왼쪽 문은 열 수 있지만, 오른쪽 문은 열면 그대로 쏟아져버릴 것이 분명했다. 왼쪽 문을 활짝 연채로 오른쪽으로 손을 뻗어야 했다.


정리가 잘 안 되어있는 이 집의 주인공은 한편에서 굴을 파고 있는 두더지였다. 두더지는 오늘도 땅굴을 파는 것에 전념하였다. 굴을 파는 동안에는 한 가지 동작만 반복하기 때문에 잡생각이 나지 않았다. 누군가 두더지의 모습을 촬영하여 유튜브에 올린다면, 10초 뒤를 반복해서 누르고 눌러도 똑같을 것이다. 그만큼 지루할만한 일을 두더지는 지루해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굴을 파고 난 다음, 물 한잔에 목을 축였다. 물을 마시면서 바라본 창문에는 햇빛이 반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두더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조금 더 파야겠다’ 두더지가 집의 굴을 파려고 하는 이유가 햇빛 때문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떠 있다. 많은 동물들이 자기 일에 한창일쯤, 나지막이 잠에 깬 두더지가 잠에서 겨우 버둥거릴 때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두 눈이 똥그래진 채로 창문으로 밖을 쳐다봤으나 두더지 집 창문으로는 지나가는 동물들의 발과 올려다보는 하늘뿐이 보이지 않았다.

- 누구세요?

- 나야 오리!

오리는 두더지와 오래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지만, 두더지 집에 종종 찾아오곤 했다. 두더지는 오리가 자신을 만나러 오는 게 좋기도 불편하기도 했다.


- 들어와

문을 열자마자 들어오는 노란색 깃털의 주황색 부리를 가진 오리는 두더지와 집 내부를 쓱 훑어보더니 들어왔다. 오리가 발을 내딛을 때마다 축축한 흙에서는 ‘척척’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듣고 멍하니 바라만 보는 두더지였다. 오리는 자주 그래 왔던 것처럼 식탁 맞은편 의자에 앉아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내가 뭘 가지고 왔어” 오리가 식탁에 건네 온 상자 안에는 울퉁불퉁 못생기고 커다란 고구마와 그보다 조금 작은 고구마 이렇게 두 개가 들어있었다. 두더지는 오리가 센스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처럼 흙속에서 자라온 열매가 환경이 비슷해서인지, 맛이 좋아서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두더지가 가장 좋아하는 건 뿌리 작물이었다. 오리가 자신을 잘 아는 것 같아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고맙고 감동스러우면서 무언가가 불편한 마음마저 들었는데, 자신도 무언가 주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리야 차 한잔 할래?” “좋지~!” 대답이 끝나자마자 오리는 지난날 겪었던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마치 소지품이 잔뜩 들어있는 가방을 뒤집은 채로 탈탈 터는 것처럼 말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날씨 이야기부터 시작되어 이웃 달팽이와 크게 싸운 이야기까지 다다랐다. 오리는 이내 추임새만 얹고 더 긴 이야기를 하지 않는 두더지를 바라보곤 식탁으로 눈을 옮겼다. 잠깐 침묵이 흘렀지만, 두더지와 오리의 대화에서 이런 침묵은 있는 일은 잦았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두더지는 분주히 움직였다. 주전자에 물을 올려 끓이고, 찻잎을 내리고 자신이 혼자 집에 있을 때는 쓰지 않는 예쁜 찻잔을 꺼내어 닦았다. 닦은 찻잔에 차를 내리면서도 오리의 말에 호응을 했다. “아 진짜” “너무 했다” “어떡해” 추임새를 하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고구마를 받은 고마움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모른 채 지나갔다는 마음이 들어 신경 쓰였다. 결국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시는 동안 오리의 이야기를 한참 하고 나서 오리는 일어났다. 오리가 “그만 가볼게”라고 말을 하는 순간까지, 아니 문 앞에서 배웅을 하기까지 두더지는 오리 말에 “그랬구나” “아 진짜”만 한 것 같았다. 인사를 건넨 후 쿨하게 퇴장한 오리가 나가자 집안은 음악을 일시 정지한 듯 갑자기 조용해졌다. 집안 분위기를 느끼고 이내 편안해진 두더지는 ‘이제 차를 제대로 마셔볼까’ 생각했다. 신기하게도 아까와 똑같은 자리, 똑같은 차임에도 향이 진하게 나고 맛이 더 잘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마칠 때쯤 식탁에 놓인 고구마가 든 상자를 열어보았다. 상자 안에는 고구마와 분홍색의 ‘무언가’가 들어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지만 두더지는 늘 보아왔던 것처럼 놀란 기색 없이 그 ‘무언가’를 상자 안에서 꺼내었다. 그 ‘무언가’는 꼭 물풍선같이 말랑하며 안에 손 끝에 착 감기는 부드러운 촉감이었다. 양손으로 꺼내드니 따뜻한 온도마저 손바닥에서 느낄 수 있었다. 두더지는 이것이 고마움이라는 걸 알았다. 오리가 자신이 좋아하는 고구마를 사다 준 것에 대한 고마움. 하지만 차를 내리는 동안 타이밍을 놓쳐 말하지 못한 고마움이 오리가 이미 자리를 떠난 후 남아있었다. 양손에 잡아든 분홍색의 따뜻한 온도를 가지고 말랑말랑한 고마운 마음을 들고, 두더지 머릿속에는 아까의 장면 장면들이 지나갔다. 코에서는 덥고 무기력한 기운이 ‘후-‘하고 나왔다. 그리고는 옷장으로 향했다.




한 손으로 고마움을 안은채 한 손으로 옷장문을 열었는데 아뿔싸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 문을 열어 안에서 꾸역꾸역 넣어놓았던 무언가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음들은 각자가 자기의 자리가 아니라는 듯이 구겨지고, 눌려 있었다. 좀 전에 발견한 ‘고마움’도 여기에 두어야 하는데 옷장에 둘 데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두더지는 마치 세상이 자신을 얼마나 골탕 먹이는지 실험하는 몰래카메라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좋은 순간을 조금도 허락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곤 짜증이 나서 마치 세상에게 보이려는 듯이 쏟아져 나온 것들과 손에 들고 있던 고마움을 꾸겨 넣고 옷장 문을 쾅 닫았다.


원래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이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마음들과 기억들을 가지고 있기가 힘들어서 상자에 하나둘씩 넣기 시작했었다. 그런 상자가 여러 개로 늘어났고, 그런 상자를 보관하려 찬장과 옷장, 서랍장에 구겨 넣었다. 언젠가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언제든, 지금이든 두더지는 이렇게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마음들이 많다는 것이다. 두더지에게는 이 것이 일상이었으며, 익숙한 듯해도 분류도 정리도 힘들었다. 이 때문에 두더지는 옷장에서 옷을 꺼내는 것은 생각하기도 힘든 일이 되어 버렸다. 간신히 닫아둔 옷장 문 밑에는 미처 넣지 못하고 떨어진 여러 가지 마음들이 있었다. 마치 성게처럼 뾰족 거리는 불편한 마음도 있었고, 구름처럼 잡아 들어도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은 외로움도 있었다. 두더지는 이 마음들을 상자에 넣어 옷장 위에 두었다. 그리고는 이내 중얼거렸다.


‘이대론 안 되겠어. 정리를 해줄 누군가가 필요해’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하는지 누군가 알려주면 좋겠어’


그렇게 두더지는 정리를 해줄 누군가를 찾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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