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코파이 Mar 01. 2024

에펠탑에 가면 조심해야 할 것

인생사 새옹지마

함께하는 두 번째 파리였다. 그날은 바쁘게 돌아다니는 대신 집 앞 산책 나온 파리지앵들처럼 느긋하게 즐기고 싶었다. 여행 막바지라 지친 마음과 아쉬움이 한데 섞여있었다. 며칠 후면 한국행 비행기를 타게 된다. 비행기를 타면 가장 먼저 무엇이 생각날까. 역시 에펠탑인가? 고철덩어리지만 이상하게 끌리고, 파리 시내 어딜 가나 눈으로 찾게 되는 에펠탑. 낭만적이라는 프레임을 사람들이 씌워놔서인지, 마케팅에 내 마음을 홀린 건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 이상의 특별함이 있다. 여행지 가면 남들 다 가는 트레이드마크 대신 나만의 무언가를 찾는 걸 좋아해 패키지여행도 한 번을 안 가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파리에선 에펠탑을 보고 또 보고 싶다. 우리는 그날, 에펠탑 소풍을 가기로 했다.  


초여름이었음에도 파리에는 여름이 성큼 다가온 듯 거리는 어느새 한여름의 열기를 뿜어낼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대강 트레이닝복에 운동화, 에코백. 편한 차림으로 집 앞 외출하듯 편히 나갔다. 가는 길에 맛있는 샌드위치도 사고 근처 마트에서 100% 착즙 오렌지주스도 사고. 와인을 살까 잠시 고민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와인을 마시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뻘게진 남편이 세포 하나하나에서 술냄새를 풍길 텐데. 파리에서 벌건 대낮부터 홍익인간(붉은색으로 물든 사람)이 되어 돌아다니면 곤란하다.


와인대신 선택한 커피는 커피 비애호가의 입장에서도 숭늉인지 사약인지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지는 맛이다. 그래도 맹숭맹숭한 커피에 파리의 분위기를 한 스푼 더하면 그것 또한 근사한 커피가 될 거라 합리화했다. 한 손에 하나씩 커피를 들고 우리가 파리지앵이라도 된 양 가벼운 발걸음으로 에펠탑으로 향했다.


<미셸 들라크루아, 노란열기구(2001년작)>


에펠탑 뒤편 초록색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커다란 나무들이 뜨거운 해를 가려주고 있어 시원하고 쾌적하다. 거기서 여행 중 가장 느긋한 오후 시간을 보냈다. 커피에 샌드위치를 먹고 책 보고 이야기도 하고. 아이는 함께 있다가 어느새 지루해졌는지, 비둘기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유럽엔 비둘기가 참 많지?"

"요샌 우리나라에도 비둘기 천지인데, 뭐. 비둘기는 이제 어딜 가나 많은 것 같아."

"나 예전에 비둘기똥 맞은 거 생각나?"

"전에 얘기해 줘서 알지. 불길하니까 그 얘긴 하지 마."

"알았어. 그나저나 이렇게 있으니깐 정말 평화롭다."

"돌아가도 이런 시간을 갖자. 날 좋을 때 한강이나 서울숲에 가 있어도 좋겠다, 그렇지?"

가벼운 대화가 오고 갔다. 배도 부르고 나무에 가려진 햇살은 따뜻하고 잠이 솔솔 쏟아졌다. 남편의 무릎을 베고 낮잠을 한숨 자고 개운하게 일어났다. 자기도 졸렸다고 하면서 커피를 마셔도 졸린걸 보니, 물을 탄 게 분명하다고 투덜투덜 대며 큰 몸을 벤치에 구겨 넣는 남편. 혼자 두면 노숙자처럼 보일까 싶어 내 무릎을 내어주며 잠시 에펠탑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퍽!이었나? 촤락!이었나? 우리의 에코백을 스치며 남편의 옷으로 착륙한 그것. 황토색과 흰색과 투명한 색의 뜨거운 그것. 그것이 떨어진 위로 고개를 들어보니, 나무 위에 곤히 잠든 비둘기 한 마리가 있었다. 마치 남편의 오마주인가 싶을 정도로 비슷한 자세의 세상평온한 그놈이. 하필이면 비둘기 엉덩이에서 남편까지는 무성한 나무에서 유일하게 나뭇가지 하나 없이 '뻥' 뚫린 고속도로 같은 직행길이었다. 만약 머리를 돌려서 잠들었다면... 상상력을 발휘해 보니 아찔하다. 하늘에서 떨어진 비둘기똥 공격이라니.


화들짝 놀란 남편은 망아지처럼 펄쩍 뛰어올랐고, 그 바람에 비둘기똥은 주르륵 흘러내리며 흰색 옷이 똥색으로 곱게 곱게 물들었다. 마치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처럼 가방 여기저기에도 흩뿌린듯한 갈색 흔적이 촤르륵 남게 되었다. 사태 파악이 덜 된 남편이 가방을 막 휘저었다. 나의 "안돼!!" 외치는 소리는 한 발 늦게 가 닿았다. 그 바람에 가방 속까지 들이닥쳤던 비둘기똥은 아이 수첩이며 색연필이며 책들까지 열심히 이동하며 온 가방 안을 똥범벅으로 만들어놓았다. 처참했다. 아이 어릴 때도 이런 똥치레는 해본 적이 없었는데. 근처 수돗가로 달려가 하나하나 씻어내고 문지르며 똥이 없던 과거로 돌아가려 애쓰지만, 한번 생긴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게다가 씻는 수도는 하나. 우리 뒤에 사람들이 기다리면, 씻다가 자리를 내어주다가를 반복하느라 30분은 족히 지나서야 징글징글한 똥치레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위력은 새삼 대단했다.


<잭슨 폴록(1912-1956), 아라베스크(1948년작)>


"여보! 그래도 비둘기똥 떨어진 데가 얼굴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이야."

"자는데 아빠가 입 벌리고 잤다고 생각해 봐. 끔찍해, 우웩!"

나와 아이가 한 마디씩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넨다. 비둘기똥치레 정리하다가 얼굴도 똥색으로 변한 남편은 그걸 말이라고 하냐며 핀잔을 준다. 아이는 어느새 비둘기똥이 떨어진 곳을 올려다보며 미동도 안 하는 비둘기에게 말도 걸고 혼내기도 하고 마냥 즐겁게 각도 계산을 하고 있다. 나는 나대로, 아까 내가 비둘기똥 얘기를 해서 부정탄 건가 하며 잠깐 추억에 빠졌다.




23살 가을. 학교를 휴학하고 떠난 여행에서, 중간 목적지는 네팔에 있는 워크캠프였다. 워크캠프는 해외에서 하는 자원봉사 프로그램. 봉사를 하면서 현지인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며 문화도 체험할 수 있었다.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맡았다. 함께 살게 된 가족은 할머니부터 꼬맹이까지 열 명의 대가족이었다.


일과는 아침 7시에 시작되었다. 할머니께서 아침식사를 준비하시는 동안, 나와 다른 가족들은 씻고 학교나 직장으로 갈 준비를 마쳤다. 나는 아침에 머리를 감고 말리는 습관이 있었고, 씻고 나서는 4살 꼬맹이와 함께 마당에서 놀았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가 나무에 달린 어떤 열매를 따달라고 해서 손을 뻗는 와중이었다. 갑자기 머리에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싸한 뜨거운 느낌.


"으웨엑 이게 뭐야!!!!"

4살이 깔깔 웃으며 어설픈 한국말로 나를 따라 했다. 머리 정중앙에 떨어진 그것은 비둘기똥. 머리에 떨어진 갈색과 흰색의 똥이 얼굴 쪽으로 떨어지려는 찰나, 할머니가 다가와 손으로 휙 하고 씻어주셨다. 원래 카리스마 넘치고 말수가 별로 없으신 분이었는데, 껄껄껄 소리 나게 웃으셨다.

"lucky girl."

할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며 엄지 척과 함께 그 뒤에 네팔어로 뭐라 뭐라 덧붙이셨다. 영어 잘하는 그 집 막내아들이 번역해 주기로는, 비둘기똥을 맞는 건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 너에게 어마어마한 행운이 있을 것이다라고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는 거다. 그날, 학교에서 제일 말 안 듣기로 소문난 3학년반 아이들이 갑자기 엄청 얌전해져서 '이것은 비둘기똥 덕분이다.'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비둘기똥은 나에게 행운의 상징이 되었다.




"여보, 생각해 보니깐 그때 비둘기똥 머리에 맞고 좋은 일이 있었어!"

네팔에서부터 비둘기똥이 행운의 상징으로 변모한 건, 사실은 할머니의 해석 덕분이었다. 비둘기똥을 머리에 맞는다고 좋은 일이 뭐가 있겠는가. 껄껄 웃으시며 럭키걸이라고 쌍따봉을 날려주셨기 때문에 머릿속에 각인이 되었다. 그날 있었던 자그마한 한 가지 일이라도 '비둘기똥 덕분이구나.'라고 의미 부여하며 생각하는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남편은 그런 말이 먹히는 성향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는 그때의 할머니 역할을 자처해 보았다. 저녁에 간 식당에서 후식이 맛있어서 "비둘기똥 덕분이다." 기다리던 지하철이 한 번에 오는 걸 보고도 "비둘기똥 덕분이다." 여기저기 의미부여를 하는 나에게 두 손 두 발을 든 남편이 비둘기똥 덕에 운 좋은 거 알았으니 이제 그만 좀 하라고 한다. 그 옆에서 자기가 배운 사자성어를 뽐내보고자, 아이도 아빠에게 기어이 한마디를 덧붙인다.

아빠 인생사 새옹지마야!!


우리의 세상 평온했던 오후는 가장 평온하지 않은 오후가 되었으나, 뭐든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간단한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리고 우리에겐 남들 다 가는 트레이드 마크에서 "우리만의 더럽게 즐거운 추억"이 생겼다. 에펠탑은 에펠똥으로 기억 속에 거듭나게 되었고. 떠올릴 추억을 충분히 차고 넘치게 간직한 채 우리는 며칠 뒤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우리만의 에펠똥, 안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