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코파이 Mar 08. 2024

다치고 나서 알게 된 항공사의 감동적인 서비스

하지만 굳이 몰라도 되는 세계

제주도의 현무암이 유난히 반짝반짝 빛나던 어느 여름날, 우리는 비행기 탑승을 4시간 남겨놓고 마지막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아이와 아빠는 바다 근처에서 꽃게며 물방개 같은 걸 잡고 나는 주변에서 간식과 함께 햇살을 피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엄마, 꽃게를 잡아야 하는데 자꾸 돌 속으로 도망가서 숨어있어. 아빠가 나무젓가락 좀 가져오래."

"자, 이거 가지고 가. 엄마도 한 번 구경하러 가봐야겠다."

계속 앉아만 있기 지겨워 으차! 하며 일어났다. 굽이 6센티 정도 되는 통굽 슬리퍼를 신고 있던 터라, 함께 꽃게잡이에 합류할 수 없어 아쉽던 터였다. 신나게 달려가는 아이의 뒤통수를 쫓으며 소리쳤다.

"뛰지 마, 넘어져."

"으악!!"

넘어진 건 나였다. 어느 시트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돌바닥에 '큰 대'자로 뻗었다. 울퉁불퉁한 현무암길이 시작되기 직전의 평평한 돌길이어서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시선이 전부 내 쪽을 향했다. 혹시나 앞으로 달려가던 아이가 날 보고 되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슬쩍 봤지만 그것은 헛된 기대였다. 이런 식으로 나 혼자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아픈 것보다도 일어나기가 너무 창피했다.


"아이고 아파라. 나 괜찮아요, 괜찮아."

괜히 70대 노파처럼 혼잣말인 듯 아닌 듯 날 향해있는 시선들을 향해 중얼거려 본다. 그런데 앗, 안 괜찮다. 손이며 무릎에는 피가 나고 있었고 그보다 문제인 건 왼쪽 발이었다. 어찌어찌 겨우 일어났는데, 발걸음을 떼려고 할 때마다 엄청난 통증이 몰려온다. 일단은 앉을 만한 곳을 찾아가서 아무 일 없었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몸을 끌어올려 앉았다. 손으로 아픈 발을 꾹 누르니 통증이 잦아드는 느낌이었다. 어디 부러진 거 아니야?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생각을 내쫓았다. 남편은 핸드폰을 나에게 맡기고 갔고, 그들이 꽃게잡이를 마칠 때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아이와 남편은 1시간이 흐른 후에 돌아왔다.

"엄마, 왜 여기 있어? 나 물 좀 줘."

"여보, 봐봐. 우리 엄청 많이 잡았어."   

"잘했네. 가방은 저쪽에 있어. 그런데 날 좀 보고 얘기하는 게 어때."

순수하고 귀여운 우리 집 남자들은 콕 집어 얘기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호기심 가득 궁금해하는 그들에게, 내가 넘어진 이야기를 해주며 상처들을 손수 짚어 보여주었다. 그제야 걱정을 시작하는 나의 남자들. 차까지 절뚝거리며 걸어봤는데, 걸으면 걸을수록 발 통증이 심해졌다. 아니 그런데, 둘 중의 한 명은 나를 부축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들은 '엄마가 아프니 빨리 이동해야 한다'면서 발이 아파서 낑낑거리는 나를 두고 둘이 차까지 달려갔다. "얘들아 나 좀 도와줘!" 하며 부르는 내 목소리는 내 귀에서만 맴돌았다. 아픈 발을 질질 끌다가 깽깽이 발을 하다가 차까지 겨우 이동한 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저녁 먹고 비행기를 타야 해서 시간이 별로 없었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퉁퉁 부은 게 보인다. 일단 가까운 약국에 갔다. "내가 걷기 힘드니, 너희들 중 한 명은 나를 부축해줘야 한다."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차에서 내렸다. 붕대와 반창고 같은 것을 사고 나무젓가락을 부목 삼아 같이 발에 칭칭 감았다. 그리고 다이소에서 삼선 슬리퍼를 사서 갈아 신었다. 좀 괜찮아진 느낌이었다. 그래도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싸한 통증은 무시할 것은 아니었다.  

"여보, 얼른 정형외과를 가자. 그 발로 가면 비행기도 못타."

"서울 가서 병원 갈래. 그래도 제주도 마지막 밤인데,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지금 밥이 중요해!?"

갑자기 성화다. 남편은 그 길로 제주시에 있는 유명한 정형외과를 검색해서 날 끌고 갔다. 병원은 어른이 되어서 가도 왠지 무섭다.


엑스레이를 찍고서 의사는 발등 쪽에 있는 뼈에 금이 갔다고 했다. 걸을 때마다 엄청 아팠을 거라며. 제주도에 온 관광객 중에 나처럼 다친 사람들이 많다고 위로 아닌 위로도 건넸다. 당장 반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었다. 반깁스는 한 달 정도 해야 하며, 서울 가서도 1주일에 한 번씩 엑스레이를 찍어서 뼈가 잘 붙고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는 목발로 걸음마 연습까지 마치고 병원에서 나왔다.



몸에 근육이라고는 제로인 내가, 목발을 쓰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요리라고는 못하는 나에게 갑자기 중국집 주방장을 맡아달라고 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한두 발짝 가고 숨이 차서 멈추고 한두 발짝 가고 팔 아파서 멈추고. 목발을 짚으며 한발 한발 걸을 때마다 너무 기가 차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생전 처음 뼈에 금이 가고 목발도 짚어 봤는데, 그게 하필이면 여행 와서라니. 그나마 놀 건 다 놀고, 서울 가기 직전에 다쳐서 다행이다. 공항에 도착해 수속 밟으러 가는 데까지도 시간이 한참 걸렸다. 비행기까지는 또 어떻게 가나 걱정하며 체크인 카운터에 도착해 숨을 헉헉 내쉬었다.




"어머, 고객님. 발 다치신 거예요? 혹시 휠체어 서비스 이용하시겠어요?"

"그런 게 있어요? 네!! 이용할게요."

"고객님은 깁스를 하고 계시기 때문에 휠체어로 비행기 좌석까지 저희가 모셔다 드릴게요. 저희 직원이 일반 승객분들이 가는 통로와 다른 곳으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남편분과 아이도 함께 가시면 돼요."

"오오! 정말 감사합니다."

뜻밖의 구세주를 만났다. 그렇게 우리는 남들 안 가는 비밀 통로로 비행기까지 한 번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가는 길에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 막다른 길이었다. 게임 세계에 입성한 듯한 비현실감이 느껴졌다.


또 비행기에 도착해서 어떻게 비행기 계단을 올라가나 고민하는 나에게, 걱정 말라며 데리고 간 비행기 뒤쪽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기내로 바로 연결이 되는 비밀 엘리베이터. 마치 새로운 세상으로 연결되는 블랙홀처럼 그 곳에 있었다. 그리고서 좌석 바로 옆까지 운반해 주시고 마무리. 휠체어 서비스가 아니었다면 목발 짚고 여기까지 와야 했을 수고로움과 후에 닥쳤을 근육통을 생각하니, 감격의 눈물이 차올랐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직원 분께서 좌석옆으로 휠체어를 가져다주셔서 그걸로 옮겨 타고, 비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또다시 비밀 통로를 거쳐 차 맡겨놓은 곳 근처까지 순식간에 도착. 세상에 이런 감동적인 서비스라니. 아시아나 만세!




발이 다쳐 집에만 있기 답답했던 나는 아시아나의 휠체어 서비스에 착안해, 평소에도 이용가능한 휠체어 대여 서비스를 알아보았다. 검색창에 검색을 해보니 국가에서 무료로 대여해 주는 서비스도, 사설 업체의 서비스도 있다. 다치지 않았다면 몰랐을 신세계가 펼쳐진다. 그리하여 대여 서비스를 이용해 깁스 풀 때까지 휠체어를 타고 동네 여기저기를 활보할 수 있게 되었다.


휠체어를 끌어주는 나의 동반자에게 다정하게 물었다.

"여보, 휠체어가 있어서 발 다쳐도 여행할만하겠다. 그치?"

"아니."

"아, 왜. 그래도 장점이 있어. 우린 휠체어 서비스의 세계를 알게 되었잖아.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몰라?"

"굳이 몰라도 되는 세계야. 다치지나 말자."



이전 01화 에펠탑에 가면 조심해야 할 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