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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파이 Mar 15. 2024

프랑스 대회에서 1등한 바게트의 맛 vs 플랑의 맛

겉바속촉의 정석이랄까요

작년 여름, 20여 일간의 유럽 여행을 떠났다. 이번 생일을 특별하게 보내게 해 주겠다는 남편의 말은 당연히 빈말인 줄 알았는데, 그 약속을 지킬 줄이야. 런던이나 파리 같은 큰 도시는 도보 여행, 작은 도시는 자동차 여행이었다. 큰 도시에서는 자동차가 있으면 오히려 주차 때문에 걸리적거리는데, 작은 도시는 의외로 주차 공간도 많고 여기저기 돌아보기 편리하다. 가고 싶은 곳, 어디든 찾아갈 수 있다. 그리고 운전하는 길이며 하늘이 맑고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프랑스 차는 선팅이 불법이라 차에 타는 것만으로도 뜨거운 자외선을 그대로 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풍경을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와는 다른 이국적인 풍경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운전하면서 보는 프랑스


우리의 여행스타일은 파워 J들이 보면 고개를 절레절레 휘저을 그런 것이었다. 딱히 계획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게, 출발 전 목적지를 정해 숙소를 예약한다. 가끔은 목적지에 도착해서 숙소를 찾아보기도 한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여행 일정이 자주 바뀌기도 했고, 가는 길에 검색하다 보면 새롭고도 신기한 가보고 싶은 곳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여행 일정을 너무 빡빡하게 잡다 보면 중간에 생기는 변수를 오히려 대처하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변명해 본다. 사실은 그저 성격 탓이다. 그렇다고 정말 뜬금없이 여행 경로를 짜지는 않는다. 최종 목적지와 그곳까지 가는 길 정도는 정해놓기 때문에 사이사이의 소도시가 경로에서 바뀔 뿐이다. 유명한 큰 도시의 숙소는 미리 예약해 놓았고, 여행 갔던 때가 마침 비수기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역할 분담이 잘 되었는데, 한 명은 운전을 하고 나머지 한 명은 그 시간에 구글맵으로 숙소, 밥집, 카페, 관광지 검색을 했다.




그날은 내가 운전을 하는 날이었다. 남편이 열심히 검색엔진을 돌리다가 흥분하여 외쳤다.

"여보. 오를레앙에 가면 바게트 대회에서 1등 한 바게트 맛집이 있대!"

"거기가 경로에 있어?"

"아마 있을걸? 어쨌든 꼭 가야 해. 프랑스 바게트 대회 1등이면 전 세계 1등이나 마찬가지야."

불가능은 없다. 길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갈 태세로 흥분한 남편은 군침을 흘리며 말했다. 목적지는 베르사유 궁전이었지만, 그날은 무조건 오를레앙을 들러서 바게트를 사가야만 한다. 베르사유는 이미 뒷전이었고 가도 안 가도 불만이 없을 테지만, 바게트 맛집은 꼭 가지 않으면 아마 평생 한 맺힌 잔소리를 들을 것이었다.


프랑스에서는 1994년부터 매년 최고의 바게트를 뽑는 대회 (Concours de la Milleure Baguette de Paris)가 열린다. 바게트를 대량 생산하는 공장에 맞서 제빵사들의 장인 정신을 높이 사고, 바게트의 문화와 전통을 계속 이어나가겠다는 취지이다. 바게트는 1유로도 안 하는 저렴한 값. 우리가 찾은 오를레앙의 바게트 맛집은 파리의 대회는 아니었고 그 지역의 대회에서 1등 한 바게트 맛집이었다. 하지만 파리에서 대중교통으로 바게트 맛집을 찾아가기는 힘든 일이었으므로 이 정도로 타협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리는 크고 복잡하고 갈 곳이 여전히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오를레앙에서 바게트 사기 미션을 실패하면, 파리에서 종일 찾아 헤매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내 운전 감도를 바짝 올려주었다. 그리하여 그날의 미션은

 

오를레앙에서 바게트 사서 베르사유에서 먹기


오를레앙에 무사히 도착해 일단 점심을 먹고 다행히도 바게트를 인당 1개씩, 3개를 살 수 있었다. 사실은 먹을 것에 큰 관심이 없었던 나는, 바게트를 굳이 맛집까지 찾아가서 먹어야 하나 생각했다. 점심을 먹어서 배도 부른 상태였고. 하지만 맛이나 보자 하고 바게트를 한 입 베어무는 순간, "어머! 내가 전에 뭐랬던거야." 하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이 맛은, 프랑스의 드넓은 평원에서 햇빛을 잔뜩 받은 밀들이 행복에 겨워 춤을 추다가 샹송을 부르는 농부들에게 재배되어 밀가루로 만들어진 후, 바게트 장인이 건네받아 에비앙의 미네랄 가득한 지하수와 한여름 햇빛과 바람에 바짝 잘 말려진 게랑드 천일염을 최적의 비율로 한데 섞어 바게트로 재탄생시킨, 행복을 부르는 맛이랄까! 겉은 바삭바삭하지만, 속은 촉촉하고 부드러운 겉바속촉 정석의 맛이요. 끝없이 손이 가요 손이 가,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끊임없이 들어가는 그 맛. 베르사유에 가서 먹으려던 우리의 계획은 물 건너가고 가는 차 안에서 이미 바게트 3개는 게눈 감추듯 금세 사라져 버렸다. 도착했을 땐 빈 빵봉지만이 달랑달랑. 이럴 줄 알았다면 10개쯤 사서 점심으로, 간식으로, 저녁으로 원 없이 먹을 걸 하며 입맛을 쩝쩝 다셨다.


오를레앙에서 맥주 한잔 / 바게트를 사고 행복한 남편


글을 쓰면서 검색하다 보니, 유퀴즈에 출연한 우리나라의 서용상 제빵사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바게트 대회에서 8등, 디저트인 플랑 대회에서 1등을 했단다. 파리에서 Mille & Un 이름의 블랑제리를 운영하는데, 신세계 강남 백화점에도 플랑을 파는 분점을 냈다고 한다. 플랑은 바삭한 페이스트리 크러스트 안에 바닐라 풍미가 가득한 커스터드 크림을 가득 채워 구워낸 디저트이다. 파리에서만 맛볼 수 있는 디저트를 드디어 한국에서도 먹을 수 있구나 하는 기쁜 마음에, 무려 디저트 오픈런을 해서 사가지고 왔다.


집에 와서 차를 한잔 끓여 플랑과 함께 먹어보았다. 이것도 다른 의미의 겉바속촉이다. 풍미 가득한 크리미 한 필링이 입안에서 싹 퍼지며 바삭한 크러스트와 함께 조화롭게 목으로 넘어간다. 디저트답게 필링은 거대하고, 크러스트 부분은 새똥만큼 적다. 에그타르트의 고급 버전이랄까. 단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도 대자연의 날이 다가오면 찾게 될 그런 맛, 스트레스가 사르륵 넘어갈지도 모를 기분 좋은 맛, 많이 달지 않아서 부담스럽지 않아 가끔 생각날 것 같은 맛이다.  


Mille & Un의 플랑. 오리지널과 흑임자 플랑이 있다.


바게트와 플랑을 비교해 보고자 플랑을 사 왔지만, 비교대상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에서도 바게트는 밥이고 플랑은 디저트 아닌가. 이 둘을 비교하는 것은 마치 쌀밥과 식혜를 비교하는 것과 비슷한 것 아닐까 싶다. 그래도 굳이 하나만 고르라면, 나는 바게트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이것은 바게트도 간식으로 먹는 토종 한국인의 취향이다. 아 모르겠다. 그냥 둘 다 좋고, 프랑스나 또 가고 싶다. 또 가서 뭐든지 다 먹어버리고 싶다.




어릴 땐 맛집이라고 하면 줄 서서 사기도, 오래 기다려서 먹기도 했던 것 같은데, 나이 들어가면서 그런 것들이 귀찮아지고 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묻는 나에게, 그냥 맛있는 걸 찾아내면 기분이 좋잖아 하는 단순한 남편의 대답이 잠시 머리를 띵하게 만든다. 맞다. 그냥 좋은 거. 그걸 잊고 있었다. 새로운 것들을 접하는 열정이 사그라들었고, 전보다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도, 어딘가에 무작정 뛰어드는 것도 줄었다. 맛집에 대한 열정도 그런 것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게 아닌지. 나이 탓만 하고 있기에 나의 반쪽짜리 열정을 조금 더 불태울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다는 생각이 든다. 성냥개비로 은은하게 비춰보는 정도라도 조금씩 불 피우기 시작한다면 환갑에도 청바지를 멋지게 소화하는 윤여정 배우님처럼 나의 남은 날들을 더 재미있게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삶에 열정 한 스푼만 넣어보자.


바게트 찾아 삼만리를 했던 프랑스 여행처럼, 플랑을 사기 위해 오픈런을 했던 어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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