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구천에서 저를 구해주세요.
김창옥 강사가 ‘어쩌다 어른’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은‘구천'을 떠돕니다. 현대사회의 구천은 '백화점'입니다.'안 사! 안 사! 그냥 떠돌아다니는 거죠~“
구천 (九泉)의 사전적 의미는 땅속 깊은 밑바닥이란 뜻으로, 죽은 뒤에 넋이 돌아가는 곳을 이르는 말이다.
웃었다. 아마도 공감해서였을 것이다. 함께 들은 언니들과 쇼핑을 하는 날엔 지금 구천을 떠도는 중이라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구천은 그냥 우리 세 자매의 농담처럼 이야기하는 전유물인 줄 알았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 옷은 나름 센스 있게 입혔다. 초등학교 3학년쯤 되니 큰 아이 주니가 운동복 바지를 입겠다고 선언했고, 고학년이 되니 검정, 회색, 흰색 패션으로 통일시켰다. 적어도 길거리에서 헤어롤 안 말아 다행이라며, 패션을 인정해 줬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무릎에 구멍을 내오는 바람에 운동복 바지를 참 많이도 샀었다. 패션에 관심도 변화 없이 그날이 그날 같은 비슷한 옷을 입고 지내다 중1이 되면서 주니는 패션에 대해 자신의 생각이 생겼다. 중요한 건 본인의 스타일이면 좋았을 텐데, 친구들과 비슷한 옷을 선호했다. 그동안 엄마의 패션센스는 단지 나의 것이었을 뿐, 주니는 하나도 본받지 못했나 보다. 중학교 입학부터 계절에 역주행하는 체육복 패션으로 경악하게 만들더니(한 여름에 동복체육복 집업을 입는 우리 동네 중학생들) 사복을 입는 진로체험의 날이 문제가 됐다. 그동안 입었던 옷들은 모두 입기 싫다고, 요즘은 애들 옷은 무신사에서 산다며, 자기도 무신사에서 옷을 사야겠다고 했다.
요즘 애들 패션은 ‘라떼’ 표현으로 말하면 바닥 다 쓸고 다니는 바지길이에 넓은 통바지, 물 빠진 바지 패션이다. 유행은 돌고 돈다. 그 당시 비슷한 패션이 유행했는데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 한참 유행 따라 할 때니 그러려니 하며 이해하자 했다.
본격적으로 인터넷 쇼핑을 시작했다. 나는 평소에 인터넷 쇼핑도 잘하는 편이라 별걱정이 없었다. 그런데 주체가 내가 아닌 타인이 되니 쇼핑천국에서 쇼핑지옥이 되었다. 주니는 환절기라 감기가 잔뜩 와서 열이 나는데도, 무신사 쇼핑을 두 시간이나 강행했다. 심지어 한 번도 혼자 옷을 사본적이 없고,엄마가 옷을 잘 고른다며 구천에 나의 영혼까지 팔고 있었다.
무신사가 종교처럼 느껴졌다. 하도 들락거렸더니 유명한 절이 떠올랐다. 진관사, 불국사, 수덕사....무신사가 동네 절이면 좋은 마음으로 돌아보기라도 할텐데-무신사에서 열반에 이를 지경이다. 본인 스타일이 없으니 보고 또 보고 무한 반복이다. 마치 무한의 계단처럼-
일단, 무신사에서 여러 벌의 옷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바지는 입어보지 않았던 스타일이라 주말에 동네 쇼핑몰을 돌아보기로 했다. 주말이 되어 신발과 옷을 보기 위해 쇼핑몰로 향했다. 14년 동안 몰랐다. 주니가 그렇게 신발을 입고, 옷을 입는데 진심인 줄 -그동안 그렇게 ”입어봐라, 신어봐라 “해도 싫다고 한번 입고, 신고 산다 만다 하더니 - 이젠 너무 신고 입어보고 사지도 않고 나오니, 매장직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매장을 나오며 죄송하다는 말을 기어들어가게 하며, 너무 당당한 아들뒤로 숨듯이 나왔다. 동네 쇼핑몰에서 식사, 영화 보기, 동네 친구들과 약속 외엔 10년 넘게 다니면서도 그 공간에 쇼핑으로 두 시간을 보낸 역사가 없었다. 고작 바지 두 개, 신발 한 켤레를 사려고 두 시간 반을 - 네 식구가 끌려 다녔다. 쇼핑 따라다니다 지친 딸과 남편은 집으로 보내고, 아들과 둘만 남아 쇼핑의 피날레를 마쳤다.
“어때?”
“괜찮아. 얼굴이 밝은 편이라 색은 전반적 으로 잘 어울리는 편이여서 더 마음 가는 스타일로 골라" (화내지 아않고 말한 나를 칭찬한다. )
“다 나쁘지 않아" 쇼핑할 때 최악인 말을 내뱉는다.
오 주여! ‘절대 아들의 의견엔 보태지 않아야 한다‘가 사춘기와 쇼핑 일계명이다. 의견에 점이라도 붙이는 순간나중에 후폭풍은 다 내책임 되기에-
바지 두 개 정도로 선택할 수 있도록 돕고, 최종 선택은 주니가 하게 했다. 흑백요리사 최종우승자 뽑을 때만큼이나 고뇌와 인고의 시간이 주니에게 필요했다. (수학문제 풀 때 그렇게 고민해 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문득, 백종원과 안성재 셰프가 그리웠다. 그들이 버튼 눌러서 결정해 주었으면 얼마나 좋아!
그날, 동네에서 만보를 걸었다. 집에서 10분 거리. 쇼핑몰에서가 거의 8 천보였을 것이다.
쇼핑의 기본은 원하는 스타일을 대충 정해놓고 눈으로 먼저 보고, 마음에 드는 옷 두세 번 입어보고 결정해도 충분하다. 그런데 딱히 스타일이 없으니 맨날 귀찮다는 아이가 대 여섯 벌의 옷을 입어보았다. 아직도 그 놀라움이 뇌리에서 쉽게 가시질 않는다. 이번 쇼핑을 통해 우리 아들이 쇼에서 계속 옷을 바꿔 입어야 하는 패션모델도 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도 잠시 해보았다. 감사하게도 마음에 드는 바지를 구입했고, 무신사에서 후드티도 구입했다. 최근 가장 잘한 일인 듯하다. 정말 진짜 최고 다행이었다.
계절의 변화를 좋아했다. 사계절이 전해주는 신비함, 아름다움은 해가 갈수록 더 깊어지고 좋았다. 바람의 냄새, 꽃들의 변화, 어떤것으로도 대체 될 수 없는 자연이 주는 놀라움은 늘 나를 설레게 한다. 그런데 무신사 쇼핑 이후, 계절이 바뀌는 게 벌써 두렵다. 중학생은 평일이고 주말이고 그냥 계속 교복만 입는게 입법화되었으면 좋겠다는 쓸데없는 생각까지 도달한다.
아름다운 가을 지나 추워지면, 겨울이 올 테고, 겨울이 오면 봄이오고 봄이 오면 또 구천을 떠돌겠지? 온라인 구천, 오프라인 구천~혹시 무신사에서 영혼이 빠져나오지 못할까하는 두려움으로 오싹하기까지한 가을밤이다.